개인적인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의 절묘한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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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의 절묘한 조화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2.1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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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서전과 반성적 회고: 알렉산드르 게르첸 읽기 | 문광훈 지음 | 아카넷 | 528쪽

 

19세기 러시아 작가이자 언론인인 알렉산드르 게르첸(Aleksandr Ivanovich Gertsen, 1812~1870)의 자서전 『나의 과거와 사상(My Past and Thoughts)』을 바탕으로 한 게르첸 평전이자 자서전 글쓰기에 관한 책이다.

게르첸은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혁명가이자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그가 죽은 지 50년 후에 레닌은 그를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또한 이사야 벌린은 게르첸을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19세기의 위대한 작가들과 동일한 반열에 두고 『나의 과거와 사상』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등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자서전의 걸작으로 평가했다.

『나의 과거와 사상』에는 게르첸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경험담이 시대 순으로 서술되어 있다. 유명한 모스크바 참새 언덕에서의 어린 날의 맹서에서 시작하여 젊은 날의 체포, 투옥, 추방, 망명, 망명지에서의 정치적 활동과 언론 활동으로 이어지는 게르첸의 삶은 그대로 19세기 러시아의 사회사로 수렴된다. 저자는 개인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독특한 조합을 이루고 있는 게르첸의 자서전을 자서전의 모범 사례로 꼽고, 개인의 자서전 쓰기까지 그 생각을 확대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평전이면서 자서전 글쓰기라는 독특한 구성을 갖췄다.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1812년 부유한 러시아 지주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게르첸은 대학 시절에 차르 정부를 비판하고 사회개혁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두 번의 유형을 겪었다. 그리고 35세 무렵 러시아를 떠난다. 그 후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23년에 걸친 기나긴 망명 시절 동안 그가 골몰한 것은 언론 활동이었다. 그는 1853년 런던에서 ‘자유러시아통신(Free Russian Press)’을 설립하였고, 1856년에 정기간행물인 《종(鍾, Kolokol)》을 발행하였다. 1857년부터 11년 동안 나온 이 간행물을 통해 그는 러시아 차르 정부의 무능과 관료주의의 폐단, 농노제의 억압과 민중의 고통스러운 궁핍을 가감 없이 보도하였다. 이 간행물들은 러시아 사회로 몰래 반입되어 사회정치적·지적 분야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마침내 1861년 러시아의 농노해방을 실현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게르첸은 진보적 언론인으로서 그가 추구한 사회주의는 이른바 농민적 인민주의(agrarian populism)였는데, 이것은 사회구조가 농업에 기초한 집산주의적(collectivist) 모델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게르첸은 나로드니키(Narodniki) 운동뿐만 아니라, 이 운동에서 퍼져나간 여러 형태의 비슷한 운동들, 이를테면 미국에서 일어난 농민 공동체 운동의 이념적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19세기 러시아 지성사는 세계 최고의 지적 지형도를 보여주었다. 이 전체 지형도에서 게르첸은 흔히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리고 사회주의 이념의 역사에서 그를 마르크스와 대등한 위치를 가진 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는 과격한 사회주의 이론가나 왕당파, 러시아 정교주의자나 슬라브 민족주의자 같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면서도 민중의 실상을 직시하고자 하였고, 자신의 계급적 입장으로부터도 거리를 유지하고자 애썼다.

자서전이란 말 그대로 자기 스스로 쓴 글로 자기 서술의 형식을 띤다. 그래서 자서전에서는 작자와 화자, 주인공이 같다. 자서전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쓰는 만큼 주관적이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며 검토하고 성찰하는 ‘반성적 거리’가 개입한다. 이 반성적 거리감 덕분에 주관성을 조금씩 덜어내고 더 높은 객관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잘된 자서전이라면 보도문 이상으로 객관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작자 개인의 내밀하고 실존적인 사연이 없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자서전에서는 개인사와 시대사, 개별적 실존과 집단적 역사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이렇게 두 영역이 겹친 삶을 사는 것은 대개 정치가나 철학자 혹은 성인 같은 위대한 인간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서전의 저자가 위인(偉人)인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하여 이들이 펼쳐 보이는 개인적 삶의 서술은 그 자체로 시대적 사건의 기록물이 된다.

게르첸의 자서전에는 1800년대 삶이 보여주는 혁명과 좌절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 군상이 전방위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서정적 추억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객관적 진단이 있고, 가족구성원이나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소소하고 정감 넘치는 인상들도 들어 있다. 그래서 사회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실존적 차원에서도 검토해 볼 만한 대목이 많다.

어느 대목에나 등장인물과 관련되는 사건과 그때그때의 대화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소설가적 묘사 능력과, 그 자리에서 사건을 보고하는 듯한 저널리스트적 현장성, 그리고 그 당시 나타난 느낌과 생각을 고전적 비유와 문학적 인용으로 연결 짓는 학문적 능력이 두루 배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글에서나 묘사되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마음이고, 이 객관적 태도에 밴 균형 감각이 아닌가 여겨진다.

저자가 게르첸의 글을 통해 결국 배우고자 하는 것은 삶의 미시적 변형 가능성이다. ‘우리의 삶과 현실이 어떠하고, 이 현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내 삶을 살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과 그 삶의 조건에 대한 내밀한 성찰이다.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의 삶을 돌아보듯이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이렇게 돌아보면서 자기를 넘어 세계의 친구가 되듯이, 그렇게 읽은 자서전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자서전을 직접 쓸 수도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삶을 보다 넓고 깊게 변형해 갈 수도 있다. 이것은 좀 더 적극적인 실천의 방식일 것이다. 이 실천의 시작은 현실의 직시에 있다. 게르첸의 자서전은 인간의 이런 근원적 욕구를 확인시켜 주고, 본성의 한계만큼이나 본성적인 이 고귀한 의지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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