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드문 법률 전문가 구택규·구윤명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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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드문 법률 전문가 구택규·구윤명 부자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3.02.18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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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 교수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법률 공부에 무관심한 풍조

조선시대 선비들은 경전을 금과옥조로 여겨 사서(四書), 삼경(三經)은 달달 외면서도 정작 관직 생활에 필요한 법률 공부는 등한시했다. 자연히 지금의 법학에 해당하는 학문인 율학(律學) 공부는 사대부보다 격이 떨어지는 중인 이하 신분이 하는 것으로 여겼다. 잡과 시험의 하나인 율과(律科)는 합격자의 대우나 응시자의 신분 또한 문과(文科)에 훨씬 못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다산 정약용이 보통의 다른 선비들과 달리 율학과 같은 실용 학문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실제로 다산은 해박한 법률 지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당대 법과 형벌 집행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사법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다산이 보기에 지방관은 법을 잘 알아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과거에 합격하고도 『대명률』도 한 번 제대로 읽지 않고 6품 벼슬에 오른 관리들이 고을 수령을 구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요즘 선비들이 배우고 읽히는 것은 한낱 시(詩)이며, 한가롭게 있을 때는 마작이나 골패 놀이만 생각한다. (『목민심서』, 형전 단옥조)

다산이 사대부 관리들의 법률에 대한 무관심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법률서 편찬에 참여하는 등 법률 전문가로 활동한 관리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영, 정조대의 문신 구택규(具宅奎: 1693~1754), 구윤명(具允明: 1711~1797) 부자이다. 

 

         구택규·구윤명 부자의 초상화. 전자는 서울역사박물관, 후자는 국립중앙박물관 『명현화상』 수록.

구택규, 법전 편찬사업에 참여하다

이들이 법률에 조예가 깊었던 배경이 궁금한데, 아버지 구택규부터 알아보자. 구택규는 숙종대에 관직에 입문해서 경종, 영조대까지 활동한 문신으로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능성은 요즘의 전남 화순군 능주면을 말한다. 

능성구씨는 조선 전기부터 유명한 무반(武班) 집안이었는데, 문신으로 현달한 인물도 많았다. 특히 구택규의 가계는 능성구씨 중에서도 여말선초에 위화도회군을 도와 공신에 녹훈된 구성로(具成老)를 파시조로 하는 도원수파(都元帥派)에 속한다. 구택규의 7대조 구사맹(具思孟: 1531~1604)은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부친이며, 5대조 구인후(具仁垕: 1578~1658)는 무과에 급제하여 인조반정에 가담한 공신이다. 이로 볼 때 구택규는 훈척 가문이라는 가문의 세(勢)를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구택규의 법률가로서의 능력은 법전과 각종 법률서적 편찬 작업에 참여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조는 경국대전』 이후 한동안 없었던 종합 법전 편찬 작업을 단행하여 1744년(영조 20)에 『속대전(續大典)』이 완성되었다. 이 때 구택규는 편찬에 참여한 관리 열여덟 명 가운데 이름을 올렸다.

 

    『속대전』. 해당 사진은 편찬을 맡은 관리들의 명단을 적은 부분으로 구택규는 중간쯤에 있다. 규장각 소장

1748년(영조 24)에는 어명을 받아 법의학서인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 편찬의 일도 맡았다. 이 책은 세종대의 『신주무원록(新註無冤錄)』의 증보판에 해당하는 책으로, 시신 검시와 관련하여 현실에 맞게 고칠 부분은 고치고 해설을 덧붙인 서적이다. 이처럼 그가 법전과 법의학서 편찬 작업에 차출될 만큼 국왕 영조는 그의 전문성을 인정했다.


구택규가 만든 법률서, 『백헌총요』

앞에서 우리는 구택규가 국가적인 법전, 법률서 편찬 작업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그가 만든 책 중 또 하나 주목되는 것으로 『백헌총요(百憲摠要)』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대명률』과 수교 등에 나오는 법조문을 주제별로 나눠 일목요연에서 분류한 책으로, 당시 통용되던 형률을 여러 곳에서 모아 하나의 책에 편집, 정리했다는 점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형식의 통합 형법 서적이라 할 수 있다. 

관리들이 『백헌총요』만 가지고 있으면 여러 법전을 찾아봐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구택규의 의도였다고 할 수 있는데, 아쉽게도 초고 형태에 머물고 출판되지는 못했다.

 

     『백헌총요』. 구택규가 작성한 원본은 아니고, 후대 필사본이다. 장서각 소장.

그렇다면 구택규가 특별히 법률에 관심을 갖고 법서 편찬은 물론 독자적인 형률서 집필까지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여러 사법기관 및 지방관에 임명된 경험이 그가 사법행정 실무와 법률 지식에 해박한 관료로 성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실제로 그는 영조대 계속해서 장예원, 의금부, 형조, 한성부와 같은 중앙의 핵심 사법기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이와 동시에 진주목사, 금성현감, 동래부사, 회양부사 등 고을 재판관 역할을 하는 외관직도 두루 거치면서 법률에 대한 그의 전문성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하겠다.

소론(少論) 탕평파로서 국왕 영조를 도운 그의 정치적 입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왕 영조의 전폭적 지원과 보호 속에서 그는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한발 벗어날 수 있었으며, 행정과 실용을 강조하는 소론계 학자들의 가풍을 계승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이 당대 보통의 관리들과 차별화된 구택규의 개성과 능력이라 하겠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구윤명

흥미로운 것은 구택규의 아들 구윤명 대에 와서 이 집안의 법률 분야 전문성이 가학(家學)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구택규가 영조를 보좌하여 국가적인 법전 정비 과업에 참여한 것처럼 아들 구윤명 또한 정조의 서적 편찬사업을 도왔다.

큰아버지 구몽규(具夢奎)에게 입양되기는 했어도 구윤명의 친아버지는 구택규였다. 구윤명은 영조대인 1743년(영조 19) 문과에 합격한 이후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세자시강원 문학, 승정원 승지를 거치면서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장관급인 판서를 두루 역임할 정도로 행정관료로서의 그의 이력은 화려했다.

구윤명은 아버지 구택규가 만든 『백헌총요』를 저본으로 해서 당대 최고의 형법전인 『전율통보(典律通補)를 완성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무원록』의 증보 작업에 참여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원록』의 한글 언해본 간행에도 책임을 맡았다. 1791년에 반포된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冤錄諺解)』가 그것이다. 구택규의 학문이 아들 구윤명에게 전수된 것이다.

 

                      『증수무원록언해』. 정조대에 편찬된 법의학서로 한글 번역서이다. 규장각 소장.

요즘 50억 수수에도 불구하고 곽상도 전 의원이 무죄 판결을 받은 걸로 시끄럽다. 검찰의 기소 독점과 야당 정치인에 집중된 수사도 논란이다. 마치 법조인들이 특권의 카르텔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앞서 본 것처럼 구택규·구윤명 부자는 조선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법률 전문가로서 가풍을 만든 학자 관리였다. 요즘처럼 법률가 세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와 같은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부분을 명확히 밝혀야 영, 정조대 사대부 관리들의 학문에서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쉽지만 이는 향후의 과제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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