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바로 그것이다.” … 문학치료학 관점에서 본 세계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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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바로 그것이다.” … 문학치료학 관점에서 본 세계 신화
  • 신동흔 건국대·국어국문학(구비문학 전공)
  • 승인 2023.02.1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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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에필로그_ 『신화, 치유, 인간: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아카넷, 272쪽, 2023.01)

 

어쩌다 보니 책을 많이 내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도 옛이야기를 전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와 전설, 민담까지 옛이야기라는 게 참 오묘한 연구대상이다. 일견 말이 안돼 보이고 기괴하거나 황당해 보이는 내용도 자꾸 들여다보면 생각지 못했던 숨은 뜻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양파처럼 깔수록 새로운 속살이 나오는 것이 옛이야기다. 그런 경험을 오래 하다 보니 어떤 옛이야기라도 깊이 들여다보면 무언가 특별한 것이 나온다는 확신 같은 걸 갖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흘러온 진짜 이야기라면 말이다. 

처음 한국 전설과 민담으로부터 시작한 나의 옛이야기 탐구 여정은 한국 구전신화에 대한 몰입을 거쳐 세계 민담으로 확장되었다. 원래 욕심이 많은 편이라 탐구영역을 더욱더 넓히고 싶은 마음이 컸고, 그 대상은 세계 신화였다. 민담과 달리 신화는 역사적 배경과 종교적 바탕, 의례적 맥락 등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이야기라서 이야기 텍스트 중심의 해석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신화 텍스트에 집중해서 심층적 의미맥락을 새롭게 투시하고 싶었다. 

그 핵심 개념은 ‘서사’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내러티브(narrative)’가 아니라 심층의 스토리적 인지체계를 뜻하는 ‘스토리 인 뎁스(story-in-depth)’로서의 서사다. 작고한 지 10년째가 되었음에도 인문사회 인용지수 상위권을 기록 중인 정운채 교수로부터 비롯된 한국의 토착 학문 문학치료학의 핵심 용어다. 문학치료학은 문학작품뿐 아니라 인간을 서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특징이다. 정운채 교수는 인간이 곧 문학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이면적 심층에 삶을 움직여가는 이야기가 있으며 삶의 과정이란 곧 그 이야기의 발현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문학치료학은 ‘자기서사’라고 부른다. 

사람들의 자기서사는 서로 같고도 다르며,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인간이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의 근본적인 치유를 이루려면 이면의 문학으로서의 자기서사를 제대로 투시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인간이 곧 문학이므로 문학을 치료함으로써 인간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이 명제가 한국 인문학이 세계에 내던진 혁신적이고도 도발적인 화두라고 믿고 있다. 이때 진단과 치료의 통로가 무엇이냐면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이다. 작품이라는 문학으로써 인간이라는 문학을 진단하고 조정하는 것이 문학치료다. 간단히 말하면, 문학에 의한 문학의 치료다.

우리의 존재적 심층을 서사적으로 투시하고 조정함에 있어 신화는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신화는 재미 삼아서 스치고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고의 집중력으로 깊이 스며들어서 일체감을 체현하는 것이 신화의 방식이다. 오래 흘러온 진짜 신화에서 이야기 주인공은 외적 타자를 넘어서 ‘또 다른 나’로서 의의를 지닌다. 근원적인 나이고 존귀한 나다. 나보다 더 소중한 나. 그와의 서사적 합치를 통해 사람들은 신령한 존재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실현한다. 미력함과 무의미함을 넘어서는 본원적인 치유 과정이다. 자기서사를 저 밑바닥으로부터 성찰하고 조정함에 있어 신화만큼 좋은 텍스트를 다시 찾기 어렵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한국의 신화들을 연구하면서 거기 담긴 도저한 치유적 힘을 깊이 실감해온 터다. 우리 신화들 속에서 나 자신의 숨어있는 본 모습을 새롭게 깨우친 적이 여러 번이다. 그 대부분은 내 안의 모순과 부조리, 나약함과 비겁함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로부터 도망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백한 진실이었으므로. 서사적 자기 발견은 힘이 세다. 원형적 스토리 형태로 이루어진 자기인식은 머리가 아닌 몸에 각인되며 무의식 속으로 침전한다.

내가 전공으로 공부한 한국 신화 외에 그리스 신화나 이집트 신화, 북유럽 신화 같은 해외의 수많은 신화들도 마찬가지의 치유적 힘을 지닐 것으로 믿고 탐색적 성찰에 나섰다. 그리고 그것은 어김없는 진실이었다.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태초의 창조신화로부터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한 문명적 신화까지 수많은 신화들 속에는 나의 다양한 숨은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이번에도 대부분은 주로 모순과 부조리, 흔들림과 부족함 쪽이었다. 그래서 혼란스럽기도 했던 자기발견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겼다. 뜻하지 않은 고백록 에세이 같은 글줄들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동흔이라는 한 사람을 드러내기 위한 글은 아니다. 누구라도 신화를 통해 내면의 심층을 발견할 수 있음을 나 자신을 구체적 사례로 삼아서 논증하고자 했다. 

흔히 신화를 범접하기 어려운 무겁고 심오한 이야기로 여기곤 한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신령한 능력과 경이로운 행적은 우리를 기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신(神)과 인간(人間) 사이의 아득한 존재적 거리! 하지만 속내를 잘 들여다보고 맥락을 살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와 상관없는 높은 별세계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수많은 신들은 대부분 이 세상 인간의 서사적 표상이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우리와 똑같이 약하고 모순적이며, 우리와 똑같이 고민하고 방황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온몸으로써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신화가 멀리 있는 특별한 것이라는 진술은 존재적 모순에 대한 가차 없는 직면이라는 측면에서 참이다. 일견 낯설고 두려워 보이는 그것은, 사실상 나의 이야기다. 너무 지엄하고 숭고해서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또는 너무 황당하고 엽기적이어서 고개를 젓게 만드는 신화 속 인물들에게서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순간, 신화는 절실한 나의 이야기가 된다. 

신화는 생로병사, 희로애락, 세상사 우여곡절을 극단의 극적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상하좌우의 편폭과 파고드는 깊이가 남다르다. 그것은 강렬한 이미지와 격정적 서사로 우리의 인식과 정서를 뒤흔들고, 뒤집으며, 파괴한다. 그 폐허 속에서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한다. 단, 일어설 수 있는가는 나 자신의 몫이다. 좌절의 폐허에 머물고 말 수도 있다. 또는 그냥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보는 만큼 보이고, 느끼는 만큼 느끼는 것. 그것이 이야기다. 

이번 세계 신화 탐구의 여정에서 확실한 거점이 돼주고 힘이 돼준 것은 한국 신화였다. 오래 살펴온 친숙한 신화이기 때문이겠으나,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한국 신화가 그만큼의 무게감과 깊이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들풀 같은 생명력으로 세월을 관통해온 한국의 민간 신화는 삶의 모든 진경(眞境)을, ‘나’의 모든 문제를 심오하고 정확하게 담아낸다. 그들이 세계 어느 신화보다도 ‘인간의 이야기’로서 정체성을 뚜렷이 지닌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치유적 신화 읽기 여정에서 한국 신화가 절반에 가까운 지분을 갖게 된 것은 하나의 필연이었다고 강변해 본다. 우리 신화를 줄이고 외국 신화를 더 넣어 구색을 갖추는 대신 화두에 어울리는 신화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했다. 

나의 세계 신화 탐구는 이제 비로소 시작이며 책의 내용에 많은 부족함이 있음을 안다. 이 책의 부족함이나 불균형은 또한 다른 이들이 채워줄 것이다. 신화는 누구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덧붙인다면, 그것은 신화 연구자만의 몫이 아니다. 신화를 통해 존재적 본원과 자기실현의 길을 탐색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자 권리다. 조지프 캠벨이 책 제목으로 삼았던 『우파니샤드』의 문장으로 거친 글을 갈음한다. — “네가 바로 그것이다!”


신동흔 건국대·국어국문학(구비문학 전공)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설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인디애나대학 민속학과와 독일 카셀대 독문학과 방문학자(visiting scholar)를 지냈다. 한국구비문학회 회장을 거쳐 한국문학치료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쓴 책에 <민담형 인간: 캐릭터 탐구로 동서양 민담 새로 읽기>, <살아있는 한국신화>, <왜 주인공은 모두 길을 떠날까?>, <스토리텔링 원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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