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에서 사랑까지 …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과정-중의-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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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에서 사랑까지 …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과정-중의-주체
  • 박미영 중앙대 전임연구원
  • 승인 2023.02.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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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쥘리아 크리스테바』 (존 레흐트·마리아 마르가로니 지음, 박미영 옮김, 책세상, 276쪽, 2023.01)

 

파리 제7대학에서 크리스테바의 제자로 수학하였던 호주 맥쿼리대학교 존 레흐트 교수와 키프로스대학교 마리아 마르가로니 교수가 공동 집필한 이 책은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사상의 원류를 되짚어보면서 크리스테바의 주체성 이론이 지닌 통찰력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테바는 1941년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1960년대 프랑스 정부장학금을 받아 프랑스로 이주하여 고등교육을 받았습니다. 

언어학과 정신분석, 탈구조주의와 페미니즘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방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이를 소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국내에 크리스테바의 저작들이 꽤 많이 번역되어있지만, 이들을 연계하여 분석한 글이 많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국내 문학과 예술 비평에서 상호텍스트성과 비체(아브젝트)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연구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이를 사상적 지형 안에서 입체적으로 논의한 연구들은 아직 많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번역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테바는 언어를 통한 의미화 과정과 주체 형성을 연결지어 과정-중의-주체를 주장합니다. 언어의 사용은 그 사용 주체와 분리될 수 없고, 의미는 과정 안에서 생성되기 때문에 과정-중의-주체는 단일하고 안정적인 주체가 아니라 이질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열린 체계를 의미합니다. 크리스테바의 역동적인 주체 개념은 프로이트와 라캉이 설명하는 주체의 모델을 활용하면서 이를 수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테바가 언어적 주체 이론에 정신분석학을 도입하는 것은 언어학이 언어 이외의 의미화 과정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드러나듯이 꿈의 이미지는 무의식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미화 과정을 이미지와 같은 기호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라캉은 프로이트의 에고를 본질적인 기원이 아니라 환상적 통일체로 설명하면서 주체성을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발전시킵니다. 프로이트의 주체에게 아버지는 되고자 하는 열망의 대상이지만, 라캉의 주체에게 아버지는 아버지가 재현하는 것, 다시 말해 언어와 법으로서 상징계를 의미합니다. 크리스테바는 어머니와의 분리를 기점으로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주체를 형성하는 라캉의 이론에서 이전 단계인 상상계가 잃어버린, 분석할 수 없는 영역이 된다는 점에 반기를 듭니다. 라캉의 이론에서 어머니가 주체의 형성 과정에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테바는 언어의 사용 이전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이미 아이는 언어와 문화의 논리를 배우기 시작한다고 주장하면서 상상계는 주체가 잃어버린 영역이 아니라 상징적 질서를 포함하고 있는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라캉의 상상계는 기호계로, 언어적 효과로서 주체는 기호적 효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호계는 무의식의 야만적이고 충동적인 의미화 과정을 드러내면서 분열적이고 위반적인 주체의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또한 기호계는 정신분석학적 주체가 예외 없는 자동 기계로 전락하지 않고 상징적 질서에 반항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크리스테바의 과정-중의-주체 이론은 남성 중심의 주체 이론에 균열을 내면서 여성성과 남성성의 본질을 찾는 대신 그것이 구성되는 방식과 이 구성 방식을 벗어나는 자유롭고 생산적인 대안적 주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희망적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디스 버틀러나 낸시 프래저는 크리스테바가 정신분석이론에 기대면서 성차의 본질을 여전히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테바의 주체 이론이 1, 2세대 여성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향하고 있는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인간성을 향한 혁명성은 충분히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첫 장에서 마르가로니는 <<시적 언어의 혁명>>을 비롯한 70년대와 80년대 그녀의 초기 주요 연구들을 당대의 맥락에서 분석하면서, 크리스테바가 주체 이론을 통해 추구한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목표를 재평가합니다. 이어 반항에 관한 그녀의 최근 연구들에서 크리스테바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논의하는 방식을 면밀히 읽어내면서, 프로이트의 죽은 대문자 아버지를 되살리려한다는 혐의에 시달리는 그녀의 상징계에 대한 이해를 재검토합니다. 이어서 레흐트는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상연으로서 사랑과 그 결과물로서 멜랑콜리아를 설명하는 크리스테바의 논의를 비평하고, 그녀의 접근법이 지닌 한계와 함께 열린 체계로서 사회와 주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Julia Kristeva

또한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윤리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레흐트는 이 점에서 크리스테바와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레비나스의 철학적 개념들과 비교하면서 크리스테바의 개념들과 문제의식을 좀 더 명료하게 해설합니다. 다음으로 그는 크리스테바의 기호계 논의가 스펙터클의 시대 위험에 처한 라캉적 상상계를 구원할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이미지가 범람하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초래하는 위기가 상징적 질서의 강화라기보다는 상상계적 상상력의 고갈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기호계의 힘을 재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크리스테바의 기호계적 혁명성과 주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the symbolic(생볼릭)과 the semiotic(세미오틱)의 번역만큼 쉽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두 용어는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에 상응하면서도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라캉의 상상계는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부정되지만, 상징계에서 배제당한 것들이 남아있는 크리스테바의 기호계는 여전히 상징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저자들은 기호계와 상징계 사이에서 흔들리는 과정-중의-주체가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기호계의 혁명성을 통해 언어적 구조에 갇힌 라캉의 결핍된 주체에게 출구를 열어줄 수 있음에 주목합니다. 

또한 생물학적 성별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정의를 질서에서 배제된 기호계적 특질로 다시 이해하면서 억압된 주체라는 이해에서 출발했던 페미니즘이 대안적 주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저자들은 크리스테바가 말한 상연으로서 사랑이 자기 자신과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치유의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윤리를 레비나스의 윤리학과 비교하면서 설명합니다. 결국, 레흐트와 마르가로니의 논의는 크리스테바의 이론의 의미가 이론적 완결성이 아닌 그 실천적 가능성에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역자로서 저는 이 책이 읽기 쉬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책이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지닌 독자들에게 크리스테바의 주체 이론의 출발점을 되돌아보고, 과정-중의-주체 이론이 지닌 혁명성과 그 의의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박미영 중앙대 전임연구원

영화와 뉴미디어 이론을 공부했고, 매체와 주체성을 중심으로 포스트시네마, 포스트휴머니즘, 신자유주의, 젠더/섹슈얼리티에 관심을 지닌 연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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