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와 학자
상태바
교수와 학자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3.02.12 08: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동일 칼럼]

교수와 학자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학자가 아닌 교수도 있다. 이런 교수는 [교수]라고 지칭한다. 교수이면서 학자인 사람도 있다. 이런 교수는 [교수-학자]라고 지칭한다. 교수가 아닌 학자도 있다. 이런 학자는 [학자]라고 지칭한다.

이 셋은 자기를 소개할 때 구분된다. [교수]는 “어느 대학 아무개 교수입니다”라고 한다. 교수라는 직위를 알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교수-학자]는 “어느 대학 교수 아무개입니다”라고 한다. 자기 이름을 알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학자]는 “아무개입니다”라고 한다. 이름이 아닌 다른 것은 쉽게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교수]ㆍ[교수-학자]ㆍ[학자]가 어떻게 다른지 다 말하면, 논의가 번다하고 중복되기도 하므로 [교수]와 [학자] 비교론만 전개하기로 한다. [교수]는 아는 것이 많아 알려주려고 하는 차등론자이다. [학자]는 모르는 것이 많아 함께 알아내자고 하는 대등론자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직 많이 모자란다.

[교수]와 [학자]의 차이가 우리 주변에서 심각하게 문제되지 않아, 구분론이 추상적인 영역에 머문다. 논의를 하고 싶은 대로 화끈하게 하려면 외국의 선례를 드는 것이 좋다. 거센 반발을 피하고, 테러를 당할 위험이 있는 것도 고려해, 멀리 돌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다.

불국의 파리대학 앞에 디드로(Diderot), 인도의 델리대학 교정에 비베카난다(Vivekananda)의 조각상이 서 있다. 불국에서는 대학 이름을 ‘디드로대학’(Université Diderot)이라고 바꾸기까지 했다. 디드로도 비베카난다도 [학자]이기만 하고 [교수]는 아니었으며, 조각상이 서 있는 대학과 무관했던 것을 알면 놀랄 일이다.

두 [학자]가 학문 발전을 위해 분투한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이어받아야 한다고 다짐하려고 대학에 조각상을 세웠다. 두 [학자]가 대학 밖에서 모진 수난을 당하며 학문 발전을 위해 분투할 때, [교수]의 무리는 편안하게 지내고 온갖 갑질을 하면서 학문을 정지시키거나 역행시키기나 했다. 후대의 [교수]도 달라지지 않았으면서, [학자]를 본받겠다고 하는 것을 면책을 위한 위장술로 삼는다.

페르시아인 이슬람 철학자 가잘리(Ghazali)는 바그다드대학 [교수]가 되어 박식과 열변으로 인기 절정의 강의를 했다. 청강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나 모여들고, 국왕인 술탄이나 국정을 담당하는 재상도 있었다. 대학 밖에서 벌어지는 교리에 관한 시비 자문에도 응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존경받는 사회 명사가 되어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다.

그러다가 커다란 회의가 생겼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학문인가?” 이렇게 물으니, 혀가 굳어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문에 대해 아는 것과 스스로 학문을 하는 것은 다르다. 남들의 이론을 모아 정리하면서 다소 수정하고 보충하면 학문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있으나, 진정한 탐구의 길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 깨닫고 실행하는 것이 학문을 제대로 하는 마땅한 길이다. 이렇게 생각해 [교수]이기를 그만두고, 오직 [학자]이고자 해서 떠나갔다.

대학에서 영광을 차지하고 자세를 높이라고 가르치는 차등론 교육은 허위이고 죄악이다. 영광을 거부하고 자세를 낮추도록 하는 대등론을 말해야 올바른 가르침이다. 그릇되게 가르치는 정도가 심한 대학일수록 명문으로 이름이 높이 나서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쪽으로 나아가려고 경쟁하고 있어, 올바르게 가르칠 수 없다. [교수]가 학문을 죽이는 잘못을 그만두고, [학자]의 길을 온전하게 가려고, 가잘리는 대학을 떠나 사막으로 갔다.

가잘리가 한 말에 힘입어 논의를 확대한다. 가잘리가 강의하던 바그다드의 대학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거의 모든 대학도 학문을 한다면서 방해한다. 지식의 양을 축적하라고 하고 질적 비약을 막는다. 남들의 이론을 모아 정리하는 데 힘쓰도록 하고, 스스로 창조하지는 못하게 한다.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릇되게 가르친다. 대학의 평가나 교수의 명성이 높을수록 허위의 전도사 노릇을 더 심하게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잘리처럼 대학을 떠나 사막으로 갈 수는 없다. 오늘날에는 대학을 떠나서 가는 곳이 시장이다. 시장에서 먹고살려고 지식 장사를 [교수]보다 더 저질로 하는 것을 흔히 본다. 오늘날 세상 전역을 지배하는 시장은 아랍의 사막, 인도의 숲, 동아시아의 산과 아주 달라, 명상하고 탐구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아니다. 학문을 하려고 하지 말고, 학문에 대해 많이 안다고 자랑하는 상품을 내놓으라고 강요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학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 [교수]가 아닌 [교수-학자]이려고 힘겹게 분투하는 차선책을 마다할 수 없다. 정년퇴임을 하면 [교수]의 지위를 잃는 것을 통탄해 마지않는 동료들과는 엄청난 거리를 두고, [학자]일 수 있게 된 것을 뛸 듯이 기뻐하자. 기쁨을 말로만 하지 말고 연구에서 나타내자.

[교수]가 되지 못한 불운은 행운일 수 있다. 차등론 전파에 부득이 가담하는 정도의 악업도 짓지 않아 행복한 줄 알면, [교수]를 우습게 만드는 연구가 거의 저절로 이루어진다.  오직 [학자]이기만 해서 대등론의 원리를 더욱 심오하게 탐구해 그 혜택을 널리 베풀면, 인류 역사의 어느 대목에서 디드로나 비베카난다와 같은 자리에 선다.

말을 여기까지 하고 문을 닫지 말아야 한다. 생계 대책이 없으면 연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업에 종사하는 여가에 학문을 잘하기는 어렵다. 안경알 연마를 생업으로 삼다가 건강을 상해 세상을 일찍 떠나간 스피노자(Spinoza)의 비극을 각오하라고 할 수는 없다. 국가는 [학자]가 굶어 죽지 않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학자]의 근무처가 우리 주변의 중국ㆍ몽골ㆍ월남ㆍ북한ㆍ일본에는 모두 제도로 확립되어 있다. 불국이나 독일은 [학자] 수만 명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도록 밀어주어 국가 경쟁력을 키운다. 우리가 새로운 선진국이 되려면 이런 일에서도 앞서 나가야 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