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다시금 양심의 끈을 고쳐 매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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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다시금 양심의 끈을 고쳐 매어야 할 때이다!
  • 이명곤 제주대학교·서양철학
  • 승인 2023.02.1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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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인간의 향기가 그리운 시대 

시대가 암울하다는 말은 매 시대마다 있어왔고, 한 시대의 마지막에는 항상 종말론이 등장하였다. 요즘은 이러한 말이 늘 있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참으로 암울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우울하다. 마치 ‘나쁜 꿈’을 꾸고 난 어린 꼬마의 마음처럼 무언가 불안하고 싸한 느낌이 드는 시기인 것 같다. 도처에 대립과 갈등, 분열과 파열음이 들린다. 특히나 코로나 팬데믹이 건 3년이나 지속되면서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황폐해진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게다가 멀지 않는 곳에서 큰 두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어서 물가도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고 있다. “전쟁 중에는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악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사회가 어렵고 생활이 팍팍해지니 여기저기서 사회적 악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나 한국사회는 “출산율 세계 꼴찌”라는 불편한 진실, 아니 무서운 진실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국민이 점차 없어진다는 것은 점차 국가가 없어진다는 것과 같다. 이보다 더 무서운 진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왜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을까? 무수한 요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커갈 수 있는 조건’이 점차 사라져 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뉴스에서는 반려동물 천만 시대라고 보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4인 가족 기준이라면 대한민국의 전 가정이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사람보다는 동물을 선호하는 사회라니! 

어릴 적 시골 우리 집은 작은 동물원과 같았다. 바둑이, 장닭과 암탉 그리고 병아리들, 토끼들과 고양이 그리고 엄청나게 컸던 암퇘지와 새끼 돼지들, 집채 만했던 황소... 이러한 기억 때문에 항상 동물들에 대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동물들보다는 옆집 할머니가 더 좋았다. 왜 그랬는지 나도 알 수 없지만 나는 우리 할머니를 보러 옆집 할머니가 오시면 그렇게 좋았다. 아마도 그 할머니한테서는 인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인간의 향기!’ 그래 바로 그것인 것 같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나이가 많든 적든, 잘 생겼든 못생겼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부자이건 가난한 이건, 좌파이건 우파이건 ‘인간의 향기’를 간직한 사람은 누구나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한국사회가 동물권리를 이야기하고 동물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하는 그 선한 일들에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그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향기’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비행기를 탈 때, 학회에 발표를 하러 갈 때,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매할 때, 렌터카를 빌릴 때, 아파트의 계약서를 작성할 때,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택시를 탔을 때, 동료들과 모임을 가질 때, 심지어 논문심사를 한 뒤에나 학생들의 강의평가를 읽었을 때 ... 등 너무나 많은 일들에서 사람들에게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코로나 팬데믹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오래도록 지속된 코로나가 사람들에게 ‘각자도생’이라는 무서운 생각을 불어넣었고 덩달아 인간의 향기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선량한 본성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윤리적인 것(의무)을 모두 수행하고 그 이상을 하고자 하는 것이 곧 도덕”이라고 하였다. 즉 도덕이란 나의 이기적인 행위를 어느 정도 제한하면서 타인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인간의 향기’란 곧 자신과 이웃을 함께 사랑하는 도덕적인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함께 가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도덕적인 사회인 것이다. 어떤 사회든지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면 다른 모든 가치들이 덩달아 무너진다.

 

나르시스의 오류와 한국사회의 오류

이러한 시기에 공교롭게도 오랫동안 번역해 왔던 프랑스 철학자 루이 라벨의 『나르시스의 오류』가 요 며칠 전 출간되었다. ‘나르시스의 오류’는 일견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이 연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해 뛰어들어 죽었던 사건’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저자는 나르시스의 일화를 통해 모든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범하는 오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오류는 어쩌면 오늘날 한국사회가 범하고 있는 오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마음이 무거웠다. 

나르시스의 오류는 결국 ‘외적인 화려함’을 추구하면서 ‘내면의 것’을 등한시하고 무시하여 나중에는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간학적 알레고리’였다. 내면의 것이란 곧 ‘자아’를 말하고, 그것도 ‘윤리 도덕적인 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어떤 좋은 이념이나 사상도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의 ‘도덕적이고도 양심적인 행동양식’이 사라지면 결국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하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 참으로 순수하였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타락하게 되는 것은 곧 그들이 양심을 점차 상실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류’란 ‘정도(正道)’를 전제할 때 있을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동물들에게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주어진 본성 혹은 본능에 따라 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다. 이 말은 인간이란 인간으로서 행위하고 행동해야 할 ‘올바른 길’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날 때 그것이 곧 ‘오류’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그 조건으로 인하여 누구나 오류를 범한다. 오류를 범한다는 것은 곧 인간적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한두 가지 오류를 물고 늘어지면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혹은 인생 전체를 오류처럼 간주하는 것은 아주 사악한 일이다. 

반면 보다 큰 문제는 자신은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주장하는 그것에 있다. “한 인간의 진정성은 무엇보다 자신의 잘못과 오류에 대한 시인에서 드러난다”는 말이 있다.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오류나 잘못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 오류와 잘못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자신의 행위를 판단하는 곳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어떤 시인은 “양심은 운동화의 끈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며칠만 고쳐 매지 않으면 끈이 느슨하여 운동화가 벗겨지듯, 조금만 소홀히 하면 양심이 느슨해져 도덕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다시금 양심의 끈을 고쳐 매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의 향기’가 도처에서 되살아나고 보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커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명곤 제주대학교·서양철학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경북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프랑스의 리옹가톨릭대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전공, DEA학위를 취득했으며, 파리1대학(판테온 소르본)에서 ‘프랑스 철학사’ 관련 DEA학위를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학과 영성’에 관한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파리1대학 예술대학에서 조형미술학사 및 석사학위(한국화) 그리고 미학 DEA학위를 취득했으며, 2014년에 영남미술대전의 초대작가(한국화)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푸코와의 1시간』, 『토미즘의 생명사상과 영성이론』, 『역사 속의 여성 신비가와 존재의 신비』,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 읽기』, 『종교철학 명상록: 성인들의 눈물』 등이 있으며, 〈편하게 만나는 프랑스 철학〉 시리즈를 집필했다. 역서로는 『자아와 그 운명』, 『진리론』, 『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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