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적 기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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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기득권"
  •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
  • 승인 2023.02.0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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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

내가 근무하던 대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학생들에게 복수전공, 부전공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택하여 이수할 수 있도록 허용해 왔다. 청년 실업이 날로 심각해면서 ‘사회학과’ 같이 취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사회계열 학과의 학생들 상당수는 경영대학의 학과를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으로 선택한다. 졸업을 위해서는 일정한 전공 학점을 취득해야 하는데, 입학할 때의 학과 즉 원래의 전공 학점은 대체로 1, 2학년 때의 수업으로 충족할 수 있기 때문에 3, 4학년 학생들은 대부분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으로 새로 선택한 학과의 교과목을 수강한다. 

그래서 경영대학은 건물도 새로 짓고 교수 숫자도 늘리고 있지만, 몰려오는 학생들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교수들은 하소연한다. 그런가 하면 ‘사회학과’ 같은 학과에서는 3, 4학년 교과목을 개설하기 어렵게 되었다. 수강 신청한 학생이 일정 숫자에 미치지 못하는 강의는 폐강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3, 4학년 학생들의 상당수가 경영대학 교과목을 수강하는 현실에서, 사회학과에서 3, 4학년 대상의 교과목을 여럿 개설하면 수강하는 학생이 부족하게 되는 때문이다. 담당 교과목이 폐강되면, 교수의 실적 평가에 치명적이라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3학년 강의는 서너 교과목, 4학년 강의는 한두 교과목을 개설하고 학생들은 수강할 교과목을 선택할 여지가 없게 된다. 다양하거나 심화된 내용의 전공 교육은 말할 것도 없이, 교수와 학생 사이의 신뢰 형성조차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몇 년 전에 ‘탄력정원제’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입학정원을 채우지 못하거나 (충원율) 입학한 정원을 4년 동안 유지하지 못한 (유지율) 학과들의 입학정원을 빼내서 충원율과 유지율이 높은 학과들에 배분하거나 새로운 학과를 만들 수 있게 한 것이다. 물론 ‘비’인기학과의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반대했지만, 찬성하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더 많았고, 무엇보다 등록금 수입 결손을 앞세운 총장의 으름장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입학정원이 줄어들면 당연히 교수 정원도 줄어들고, 장기적으로 학과가 없어질 수도 있게 되었는데, 어떤 학과가 해당하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학과 제도의 유연화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학과 제도의 불안정화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교수들이 학문적 기득권에 집착해 대학 혁신을 못 하면서 공무원들 보고 혁신하라고 하고, 기업에 가서 혁신하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대통령이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문적 기득권’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학 혁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학문적 기득권 집착’이 왜, 그리고 어떻게 ‘대학 혁신’을 저지하는지는 설명이 없어 추정할 수밖에 없다. ‘학문적 기득권’을 나는 한 학문분야를 지배하며 다른 이론이나 방법의 성장을 가로막는 특정의 이론이나 방법(과 그것을 구사하는 학자)의 권력으로 이해하지만, 이는 대학에 30여 년 동안 근무하면서 학문적 기득권에 ‘매몰’된 해석일 것이다. 대통령은 교수들이 대학에서 차지하는 우월적 지위를 편가르기에 알맞게 ‘학문적 기득권’으로 불렀을 것이다. ‘대학 혁신’은 그것을 공무원이나 기업과 연동하는 맥락을 고려하면 작업하는 방식이나 작업을 조직하는 제도를 바꾸는 것을 의미하고, 교수의 입장에서는 연구하고 교육하는 방식이나 학과 제도를 바꾸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연구하고 교육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결국은 교수 각자의 인식과 판단과 역량의 몫이어서 한 덩어리로 묶어 ‘학문적 기득권’이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과 제도를 바꾸는 것은 그것에 반대하는 교수와 찬성하는 교수가 있을 뿐 아니라, 교수의 ‘기득권’을 벗어나 결정된다. 솔직히 이런 사안들은, 대부분의 교수를 실적 관리에 몰두하는 학술 기업가로 ‘혁신한’ 성과급제 대학에서 교수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교수들이 학문적 기득권에 집착해 대학 혁신을 못 한다’는 지적은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의미 없는 이야기로 대학의 현실에 대한 부실하고 왜곡된 막연한 인식을 드러낼 뿐이다. 권력에 업혀서 작동하는 시대착오적인, 그리고 교수를 ‘악마화’하는 이런 고정관념이 대학 혁신을 오도한다.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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