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에르의 삶과 연극〉의 출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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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의 삶과 연극〉의 출간에 부쳐
  • 김익진 강원대·프랑스문학
  • 승인 2023.01.2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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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에필로그_ 『몰리에르의 삶과 연극』 (김익진 지음, 지만지드라마, 608쪽, 2022.12)

 

2022년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이 되는 해다. 몰리에르는 프랑스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서양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작가다. 셰익스피어가 근대 비극의 탄생을 주도하고 세르반테스가 근대 소설의 기반을 다졌다면 몰리에르는 근대 희극의 시작을 알린 작가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는 내내 ‘몰리에르전공자’라는 표현이 붙어 다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 몰리에르에 대한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일종의 직업적 강박이 늘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미루어지고 있던 이일을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을 맞는 해가 되어, 부족하지만 이렇게 마무리한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몰리에르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담기 위해 그리마레의 「몰리에르 선생의 생애」를 번역해 놓았다. 몰리에르의 전기를 직접 기술하지 않고 17세기 작가인 그리마레가 쓴 글을 번역해 놓은 데는 이유가 있다. 

작가의 삶과 작품의 결정론적 관계를 확신하던 실증주의적 연구가 소르본느를 중심으로 19세기 중반부터 백 년이 넘게 진행되는 동안 몰리에르에 대한 연구도 소위 ‘문학 사학자’들에 의해 현대판 신상털기에 비견될 정도로 철저히 진행되었다. 그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자료집이 1963년 출간된 『몰리에르에 대한 100년의 연구』*다. 현재 이 자료집이 출간되고 60년이 흘렀지만 그 이후 몰리에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은 아무것도 발견된 것이 없을 정도로 그 실증적 연구는 지독했다.

그러나 이 문학 사학자들의 어마어마한 연구업적에도 불구하고 위 자료집에는, 출간 이전과 비교하여 몰리에르의 삶과 작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변화를 줄 만한 내용이, 냉정히 말해, 없다. 사실 몰리에르와 동시대인이면서 17세기 당시 가장 큰 문학적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니콜라 부알로부터 소르본느의 실증주의 문학 사학자 중 20세기 최고의 몰리에르 전문가로 꼽히는 귀스타브 미쇼에 이르기까지 소위 ‘일류 문학비평가’들이 “이류 작가”였던 그리마레가 쓴 「몰리에르 선생의 생애」의 진실성에 대해 분노했지만 그리마레가 서술한 내용을 반박할 만한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몰리에르의 전기를 쓰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마레가 서술하고 있는 내용을 약간씩 재구성하며 살을 붙이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몰리에르 전기는 프랑스어로 된 것만 하더라도 수백 편에 이르는데 거의 대부분 몰리에르에 관한 최초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그리마레의 글을 근거로 작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작동되었던 것은 실증적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 고증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기존 자료들에 대한 창의적 해석과 그 행간을 읽는 상상력이 동원된 허구적 구성뿐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몰리에르의 삶을 알리기 위해, 또 다른 허구를 구성하며 그 개연성을 고민하기보다는 몰리에르의 삶에 대한 1차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그리마레의 글을 번역해 놓은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몰리에르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정보의 부재는, 몰리에르 연구자들에게는 몰리에르의 삶과 사상에 대한 실증주의적 연구를 가로막는 큰 걸림돌로 작용했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셰익스피어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몰리에르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치에 선입견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했다. 몰리에르의 독자나 연출자는 실증주의적 독서의 폐단인 결정론적 시각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각으로 그의 작품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현재 전 세계에서는 매년 수백 편씩 작성되는 몰리에르에 관한 논문들을 통해서,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가인 몰리에르로부터 예수회의 정신적 제자인 몰리에르, 진정한 기독교도 몰리에르, 순수한 연극인 몰리에르, 고대 유물론적 철학의 계승자 몰리에르, 르네상스적 인간 몰리에르, 이른 낭만주의자 몰리에르, 혁명가 몰리에르, 자유사상가 몰리에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몰리에르가 끊임없이 탄생하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 같은 몰리에르 작품의 영원한 생명력이 그 많은 정당한 몰리에르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2부는 몰리에르 작품세계에 대한 분석적 이해를 위해 지난 20년간 ‘리베르티나주(libertinage)’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작성한 논문들을 정리해 놓았다. 

다른 대작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몰리에르의 작품은 서로가 밀접한 연관을 지닌 연작물이다. 그 연관성을 이루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는 연극적 개혁이자 도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극 미학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시도보다도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미학적 개혁이 상징하고 있는 의식의 변화다. 몰리에르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의식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혁명적인 의식을 상징할 수 있는 말이,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자유사상’이라고 번역된, '리베르티나주'다.  프랑스 17세기 리베르티나주는 중세의 철저한 일원화 체계에 대한 반발로서의 16세기 르네상스, 그 반발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17세기 고전주의 그리고 변형된 고전주의와 백과전서로 대표되는 18세기, 다시 19세기 낭만주의의 르네상스 재발견, 그 19세기의 다양한 변주로서의 20세기라는 전통적 해석의 틀 속에서 의도적으로 잊혀져 있던, 근대적 의식의 맹아가 된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로마교회가 부과했던 전체성을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서는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공통점을 갖지만, 16세기 인문주의가 종교의 전체성으로부터는 벗어났으나 결국 인류 혹은 사회라는 이름의 전체성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과 달리, 르네상스와 같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문제를 공통과제로 삼으면서, 전체주의의 위협 속에서도 전체성의 강조를 벗어나기 위해 개체(individu)의 다양한 가능성을 추구해온, 프랑스 근대 사상의 한 중심적 줄기였다.

몰리에르의 작품에는 작가 사상과 리베르티나주와의 관계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해주는 많은 주제들이 엮여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입각한 공교육과 스콜라 철학에 바탕을 둔 사변 의학에 대한 거부, 여인의 교육과 삶의 조건에 대한 논의, 전통을 상징하는 극 중 아버지들에 대한 반항, 미신이나 광신에 대한 경계 및 이성적 판단에의 종용, 겉모습뿐만인 도덕률에 대한 고발 등은 이미 진리라고 인식되고 있는 사실들이나 도그마들의 진실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한 예술가가 연극적 모험을 통해 동시대의 사회에 던지는 일련의 질문들이다.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인식론적인 질문들이 극적 전개와 대사 속에 녹아있다. 몰리에르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연극적 차원의 재미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의 근대의식의 탄생과 이를 둘러싼 갈등의 흔적을 되짚어 보는 사상사적 그리고 문화사적 차원의 재미도 제공해 줄 수 있는 이유다.  

 

3부는 17세기 근대의 여명기에 프랑스 사회에서 몰리에르 희극과 그 웃음이 지니는 문학사적, 정신사적 중요성을 살펴보는 내용이다. 웃음은 개인 감정표현의 한 방식이자 생리현상이지만 때로는 이런 개인적 의미를 뛰어넘어 집단 표현방식으로서의 사회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웃음은 ‘논리’와 ‘수사’가 토대가 되었던 서구의 전체주의(totalitarisme) 역사가 위대한 개인주의(individualisme)의 역사로 재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체주의 시대에 억눌려 있었던 웃음은 르네상스가 가져다준 사고의 자유로움과 함께 사회 전면에 퍼져나갔고 천 년 이상 사회를 짓눌러온 절대적 가치관에 대해 사람들이 웃기 시작하면서 그 절대적 가치관은 붕괴되었다. 이런 역사가 진행된 현장은 유럽에서 근대적 의식 혁명인 르네상스가 가장 늦게 시작되었으나 가장 처절하게 뿌리내린 16세기 이후의 프랑스였다. 다시 말해 르네상스 혁명이 야기한 현상적 결과 중 최초의 사건인 종교전쟁이 처절하게 펼쳐졌던 곳도 프랑스였으며 그 혁명의 흐름이 절대왕정과 고전주의라는 신전체주의의 저항을 받은 곳도 프랑스였고 그 저항을 딛고 일어선 대혁명을 통해 공화정의 찬란한 깃발을 세운 곳도 프랑스였던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희극과 패러디 소설이 자아내는 웃음이 우리의 분석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현대 희극을 창출해낸 몰리에르의 업적은 문학사적 의의뿐만 아니라 사회사적, 정치사적 의미로도 확장될 수 있다. 몰리에르 희극의 출현은, 유럽의 근대 정신사에서 탈봉건적, 탈종교적 움직임에 결정적 동력을 제공한 웃음의 수사학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몰리에르가 현대 희극의 탄생을 주도한 대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 정신사에 큰 족적을 남긴, 행동하는 지성이었음이 인식되는 계기가 마련되길 빌어 본다.


* 『몰리에르에 대한 100년의 연구』: 국립고문서의 연구원이었던 Madeleine Jurgens과 하버드 대학의 불문학과 교수였던 Elizabeth Maxfield-Miller가 1963년 펴낸 몰리에르 관련 자료집으로 그 이 자료집 출간 이후 지금까지 몰리에르의 생애나 작품과 관련되어 새로이 밝혀진 사실은 없다. 물론 그 이후에도 몰리에르에 관한 연구는 지속이 되었지만 문헌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었을 뿐 새로운 문헌이 발견된 적은 없다. 현재 이 자료는  아래에서 무료 pdf본으로 내려받을 수 있다.
www.siv.archives-nationales.culture.gouv.fr/mm/media/download/FRAN_ANX_008004.pdf 

 

김익진 강원대·프랑스문학

강원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고려대학교와 파리 10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몰리에르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몰리에르의 웃음에 관한 연구 및 문학을 활용한 마음 치유 실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적정인문학으로서의 인문치료≫, ≪프랑스 뮤지컬의 이해≫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아내들의 학교≫, ≪몰리에르 3부작≫, ≪예술치료의 모든 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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