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기후재난 시대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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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기후재난 시대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1.29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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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변적 실재론 입문 | 그레이엄 하먼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 448쪽

 

‘인류세’ 시대로 지칭되는 21세기에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는 철학사상적 조류는 신유물론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전회’와 더불어 사변적 실재론이 선도하는 ‘사변적 전회’임이 틀림없다. 사변적 실재론은 2007년 4월 런던에서 개최된 한 워크숍에서 레이 브라지에,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 그레이엄 하먼 그리고 퀑탱 메이야수라는 네 명의 철학자에 의해 탄생했고, 15여 년간 꾸준히 그 지적 영향력을 넓혀왔다. 사변적 실재론은 현재 대륙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새로운 조류이다. 

최근의 철학에서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을 필두로 인간과 독립적인 사물의 실재성과 물질성, 행위성을 강조하는 사상적 경향이 발흥한 현상, 즉 “실재론의 부상”이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포스트칸트주의 철학 이론들이 인간중심주의적인 기본 도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류세 시대의 중대한 문명적 위기인 기후재난을 성찰하고 해결하는 데 필요한 존재론적·인식론적·정치적·윤리적 물음들을 제기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후재난으로 특징지어지는 인류세 시대는 팬데믹, 홍수, 폭염, 멸종 등을 일상의 조건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이 자연의 주인도 아니고 세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다시 말해서 일상에서 우리는 비인간의 실재성과 행위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현실이 세계는 인간에 대하여 또한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본질적으로 인간중심적인 관점인 상관주의에 반기를 드는 사변적 실재론이나 신유물론 철학이 전 세계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하먼은 철학에서 사변적 실재론 운동이 시작된 지 한 세대 가까이가 지났기에 이제 그 운동의 성공과 한계를 평가할 적기가 되었다고 진단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최근에 사변적 실재론은 그것이 ‘정규’ 주제로서 수용된 철학계를 넘어서 미술, 건축, 문학, 고고학, 지리학, 역사학, 사회학, 체육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긴요한 새로운 관점으로서 역할하고 있다. “사변적 실재론 같은 것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비판자들의 ‘존재’ 시험을 통과한 지 오래다.

책의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과 「서론」에서 그레이엄 하먼은 2007년 4월 최초의 사변적 실재론 워크숍이 개최되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준다. 각기 다른 네 사람의 생각을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우산 아래 통합하는 공통분모는 ‘상관주의’(correlationism)에 대한 비판이다. ‘상관주의’란 “우리는 세계를 인간 사유의 상관물로서 언급할 수밖에 없고, 인간 사유와 세계는 서로 별개로 고려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반실재론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점이다. 사변적 실재론의 최초 구성원 네 사람은 모두 “인간 사유와 독립적인 세계의 실재가 존재한다”라는 철학적 입장, 즉 ‘실재론’을 신봉한다.

임마누엘 칸트 이래로 200여 년 동안 대륙철학을 장악해온 것은 반실재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이른바 ‘포스트칸트주의’ 철학(독일 관념론, 현상학,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해체론 등)이었다. 사변적 실재론은 이러한 경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새로운 포스트휴머니즘 운동이다. 더욱이 사변적 실재론은 대륙철학에 의해 금기시되어온 것, 즉 ‘사변’에 기꺼이 관여하려는 ‘대담한’ 의지로 하나가 된다. 하먼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의 상식적 실재론들과는 달리” 최초의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모두 직관에 반하거나 혹은 심지어 철저히 기묘한 듯 보이는 결론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사변적이다.”

이 책의 1~4장에서 하먼이 자세히 고찰하는 각 철학자의 주저는 브라지에의 『풀려난 허무』, 그랜트의 『셸링 이후의 자연철학』, 하먼의 『도구-존재』 그리고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이다. 하먼은 이 책들의 내용을 요약하고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덧붙인다. 이 과정에서 하먼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상가들의 차이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사람이 서로 합의하고 이견을 드러내는 논점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논점들이 철학사에서 어떻게 논의되어 왔는지를 서술한다.

이 책의 결론에서 하먼은, 사변적 실재론을 구성한 실재론들의 다양성이야말로 “내가 그 집단이 우호적인 논의를 위한 토론의 장으로서 현존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주된 이유다”라고 밝힌다. 하먼은 결론에서 이들 네 명의 사변적 실재론 사상가가 하위집단으로 분할될 수 있는 두 가지 축을 제시하며, 사변적 실재론 사조들이 수렴하고 발산하는 지점들을 정리한다. 하먼의 의해 제시된 그 두 개의 축은 (1) 과학과 철학의 관계, 그리고 (2) 사유와 세계의 통약 불가능성과 관련되어 있다.

첫 번째 축을 따라 살펴보면, 브라지에와 메이야수는 인간의 사유와 독립적인 실재에 관한 지식을 과학 혹은 수학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적 입장 혹은 수학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반면에 하먼과 그랜트는 그런 실재에 관한 지식은 직접 획득할 수 없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견지한다. 두 번째 축을 따라 살펴보면, 그랜트와 메이야수는 실재와 그 이미지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반면에 브라지에와 하먼은 실재와 그 이미지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존재하기에 ‘위험한 도약’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끝으로 하먼은 “이 책의 젊은 세대 독자들에게 다양한 사변적 실재론 사조를 중요하게 만든 것을 이해한 다음에 마침내 이들 사조를 대체해보라고 권유”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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