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예술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허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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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허물다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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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충돌하는 세계: 과학과 예술의 충돌이 빚어낸 전혀 새로운 현대예술사 | 아서 I. 밀러 지음 |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544쪽

 

이 책은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를 단번에 깨버린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그린 그림과 작곡한 음악, 유전자를 조작해 형광색으로 빛나는 살아 있는 토끼, 앉으면 온몸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의자, 원자력현미경을 통해 촬영한 나노 단위 수준의 산맥 이미지, 빅데이터를 시각화해 미학적으로 만든 영상 등 저자가 소개하는 예술의 범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어떠한 틀에도 갇히지 않고 모든 영역을 넘나들며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아티스트들은 예술가인 동시에 과학자이기도 하고, 이론 연구자이기도 하고, 기술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 또한 그들의 작품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한다.

저자 역시 그러한 예술가들 중 하나다. 그는 때때로 직접 작품에 참여하면서 예술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왔다. 특히 과학과 예술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성을 주제로 왕성한 저술활동을 해온 그는 이 책에서 과학계와 예술계의 충돌이 빚어낸 전혀 새로운 현대예술사를 써내려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르네상스 시대와 그 이전에도 과학적 사고가 예술에 영향을 미친 사례는 많이 있었다. 저자가 생각할 때 이러한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폐품을 주워 작품을 만든 라우션버그와 기성품인 변기에 제작업자의 이름을 적어넣고 갤러리에 전시한 뒤샹, ‘팩토리’를 세우고 작품을 찍어낸 앤디 워홀이 활동하던 시기부터다.

현 시대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더이상 갤러리에 걸린 평범한 그림을 뜻하지 않는다. 저자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태블릿 등의 도구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일이 일상적인 일이 되고, 3D 프린터의 보급으로 콘크리트부터 플라스틱, 생명 조직까지 출력하는 오늘날의 예술작품은 과연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붓과 물감, 테라코타와 대리석만이 더이상 예술의 주된 재료가 아니며, 예술가들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팔레트로 채워가야 할 드넓은 캔버스는 도처에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행위예술가 오를랑이나 펄린 노이즈로 유명한 과학자 켄 펄린 등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많은 예술가와 과학자들은 진지하게, 또한 유쾌하게 자신의 예술관에 대해 그에게 털어놓았다. 다채로운 작품을 감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새로운 형태의 예술에 대한 어색함이 어느새 사라지고, ‘이것을 어찌 예술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들 것이다.

저자는 과학이나 기술의 영향을 받은 예술들을 ‘아트사이(artsci)’라고 부른다. 이는 ‘아트(art)’와 ‘사이언스(science)’의 합성어로, 예술의 아름다움과 정교함을 제대로 전달하기에 적합한 단어는 아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곧 이러한 형태의 작품들 역시 아무 수식어 없이 그저 ‘예술’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책은 쉽지 않은 이론과 새로운 기술에 관한 치밀한 조사, 과학자와 예술가 사이를 넘나들며 진행된 섬세한 인터뷰로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현대예술을 낯설게만 생각하거나, 새로운 예술에 기꺼이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현대예술의 흥미롭고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따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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