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뿐인 가부장제, 살림하는 조선의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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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뿐인 가부장제, 살림하는 조선의 남자들
  • 김지현 기자
  • 승인 2020.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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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와 가족사 | 정창권 지음 | 돌베개 | 304쪽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추사 집안 5대 가족이 주고받은 85통의 한글 편지에서 조선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추사 선후 5대 가족이 살았던 18~19세기의 조선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완고한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사회, 남존여비가 극심했던 사회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편지를 살펴보면, 과연 우리가 생각한 조선 사회가 진짜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저자도 이러한 의문에서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에 주목하고 현대어 번역과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는 모두 85통이다. 이 편지는 추사 김정희를 비롯하여 선대와 후대 등 모두 5대의 가족이 주고받은 한글 편지로 18~19세기 가족의 생활과 문화, 언어, 의식 등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러 세대 다양한 가족 구성원의 편지가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남아 있는 경우는 추사 집안이 거의 유일하다. 특히 이 편지들에는 당시 여성의 역할과 의식뿐 아니라 남성의 집안일 참여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어 여성사·가족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나아가 이들 편지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또 추사의 글과 그림, 글씨 등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추사의 인간적인 면모는 어떠했는지도 잘 보여준다.

조선 후기는 완고한 주자성리학의 자장 속에서 가부장제가 정착되어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로 엄격하게 분리된 사회라고 단순하게 인식되기도 하지만, 국가보다는 집안의 비중이 훨씬 크고 집안일이 너무나 많았던 전근대 사회 조선에서 그렇게 남녀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의식주 등 일체의 생산과 소비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과 의료, 종교, 복지, 문화 등 거의 모든 사회활동이 한 집안 내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의 한 집안은 오늘날 중소기업과 맞먹는 작은 사회였고, 집안일도 엄연한 사회 활동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부장제가 정착된 사회라 해도 남성은 늘 집안일에 신경 쓰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여성의 주요 역할인 음식과 의복 수발 등 안살림, 임신과 출산 및 육아는 혼자서 하기엔 너무 벅차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남성은 평소 학문과 예술, 관직 생활 같은 대외적인 활동뿐 아니라 각종 집안일까지 함께 처리했다. 이렇게 조선 시대 집안일은 남녀 간 협력에 의해 이루어졌고, 어떨 때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많은 집안일을 수행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일반적 인식과 달리 조선 후기에 남성의 집안일은 일상적인 것이었고, 당시 남성은 그저 집안의 대표자에 불과했지 결코 가부장적인 권력의 향유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사 집안의 남성들은 가문 관리, 노비 관리, 제사나 혼인 등의 집안 행사 주관 등 많은 집안일에 참여했다. 집안일을 부부 공동의 책임이었고, 추사는 자주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집안일을 의논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면 큰 인물이 못 된다”는 고리타분한 말이 여전히 통용되고, “82년생 김지영”이 일하는 엄마들의 눈물을 쏟게 만드는 이 시대에, 조선 시대 남성의 모습은 파격이다. 이 편지들은 당시 남성이 담당했던 집안일이 상당히 많았고, 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인 자료다. 여성은 집안일을 맡고, 남성은 바깥일에 전념할 뿐 집안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을 거라는 기존의 생각은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 앞에서 여지없이 깨진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추사 집안 가족 구성원의 한글 편지 45통을, 2부는 추사가 쓴 한글 편지 40통을 다루었다. 그리고 ‘시작하며’에서 추사 집안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마치며’에서 추사 집안 여성의 역할과 의식 및 남성의 집안일 참여 양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추사 집안의 한글 편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명확히 밝혔다.

저자는 85통의 편지를 현대어로 번역하면서 편지와 편지 사이의 행간과 여백을 스토리텔링적인 요소를 가미해 생동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연결하고 메웠다. 발신자, 수신자 소개는 물론 편지를 쓴 시기와 상황을 조사해 시공간적인 배경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해설까지 덧붙여 한 편의 이야기처럼 구성했다. 그래서 85통의 편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특별하지만 평범한, 그리고 아름다운 추사 김정희 집안 5대 가족사 이야기가 장대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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