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서 르네상스를 만든 지식 파수꾼들의 놀라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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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르네상스를 만든 지식 파수꾼들의 놀라운 이야기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1.2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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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 서점 이야기: ‘세계 서적상의 왕’ 베스파시아노, 그리고 르네상스를 만든 책과 작가들 | 로스 킹 지음 | 최파일 옮김 | 책과함께 | 640쪽

 

피렌체 르네상스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성당과 교회 벽을 장식한 아름다운 프레스코화,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조각상, 우아한 건물,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 등이 연상된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품과 건축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문주의의 태동이었다. 르네상스기 지식 혁명의 최전선에는 책 사냥꾼, 학자, 필경사, 서적상이 있었다. 이들은 수천 년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고대 지식의 발견과 전파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꾼 책벌레들이었다.

이 책은 15세기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지식 파수꾼들의 이야기를 통해 르네상스의 탄생과 부흥을 추적한다. 책 사냥꾼 포조 브라촐리니가 먼지가 쌓인 서가에서 500년이 넘도록 발견하지 못한 퀸틸리아누스의 수사학 책이나 루크레티우스의 논고를 발견했을 때의 환희,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 관한 우위 논쟁, 인쇄기의 등장 이후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플라톤 전집 발간과 플라톤이 서구사회에 수용되는 과정, 고대 철학자들의 헛소리는 무의미한 것이라며 필사본을 불태워버렸던 사보나롤라 수사의 ‘허영의 모닥불’과 인문주의자들과 사보나롤라의 토론 현장 등 지적 열정이 넘치는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들 활동의 중심에는 ‘세계 서적상의 왕’ 베스파시아노가 있었다.

스위스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르네상스’라는 관념을 창안한 불후의 명저다. 이 책을 쓰기 전 스승의 미술사 교본을 보완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던 부르크하르트는 바티칸 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읽게 된다. 15세기 피렌체 유명인들의 약전을 담은 그 책의 저자는 ‘피렌체인 베스파시아노’였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부르크하르트는 시각 예술의 세계에서 책과 도서관의 세계로 관심 분야를 바꾸어 훗날 가장 이름을 날릴 역사서를 저술한다. 부르크하르크의 저서는 고대 저작의 재발견이 어떻게 ‘르네상스’를 탄생시켰는지에 관한 서사였으며, 이 뛰어난 테제는 15세기 피렌체 서적상 베스파시아노의 저술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

모든 책이 손으로 만들어지던 시절에 서적상 베스파시아노는 1천 권이 넘는 책을 제작하고 판매했으며, 그의 서점은 인문주의자들의 토론과 만남의 장이 되었다. 그가 만든 책은 고대 지혜를 담는 그릇이자, 공동체 전체가 그 지혜를 누릴 수 있도록 도서관의 장서가 되었다.

시골의 가난한 농가 출신의 베스파시아노가 ‘세계 서적상의 왕’이 되기까지의 일대기는, 책을 한 땀 한 땀 손으로 만들던 시절의 땀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물리적 공정과 함께하는 여정이었다. 이탤릭체·신고서체·고딕체 등 보다 읽기 좋은 서체를 개발하기 위한 필경사들의 노력, 오역을 피하기 위한 번역가들의 치열한 논쟁, 거대한 성당 지붕에 펼쳐진 프레스코화를 손바닥만 한 지면의 빈 공간에 구현하는 세밀화가들의 섬세한 솜씨, 이 모든 것이 정교한 과정 속에 합쳐진 채식 필사본은 차라리 한 편의 예술작품에 가까웠다.

현재 베스파시아노의 흔적은 피렌체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베스파시아노가 만든 필사본은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있지만, 그의 역할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1788년에 출간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각주에 ‘피렌체의 베스파시안’으로 그 이름이 잠깐 등장할 뿐이다. 이 책은 한발 더 나아가 각주로도 등장하지 않을 인물들을 책에 등장시켜 그들의 노고도 기록한다. 수도원 인쇄소에서 식자 스틱에 가지런히 활자들을 배열하는 수녀, 인쇄된 소식지를 판매하는 거리 행상, 맹인 가수 같은 이들 말이다.

인쇄본의 등장 이후 베스파시아노의 사업은 그의 노년과 함께 저물었지만, 그가 남긴 15세기 유명인들의 약전 《103인 명사들의 생애》는 피렌체 르네상스의 광범위한 지평들을 드러냈고, 그 지평들은 우리 시대까지 이어졌다.

이 책은 인문주의자들의 활약과 더불어 15세기 유럽의 정치적 혼란과 암투, 종교 갈등, 전쟁 등의 역사적 배경을 충실하게 제공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십자군 원정, 피렌체의 정치적 지배자 가문인 메디치가와 파치가의 갈등, 군주들의 기행과 권모술수 등은 당시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동시에, 그런 난맥상 속에서도 책은 만들어지고 지식의 여정은 계속되었음을 증언한다.

빈곤과 기근, 잔혹한 폭력이 난무하던 중세에 지식인들은 고대 로마인의 지혜를 재생해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고자 했다. 지혜를 사랑했던 인문주의자들과 이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낸 ‘세계 서적상의 왕’ 베스파시아노의 일대기는 지식과 학문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르네상스기의 낭만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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