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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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의 길
  •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23.01.2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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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번역가의 길』 (김욱동 지음, 연암서가, 280쪽, 2023.02)

 

내가 번역한 작품이 처음 활자로 찍혀 나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그러니까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할 때였다. 미국 소설가 맥스 슐먼의 단편소설 「사랑은 오류」를 번역하여 교내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발행하던 잡지에 실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한 영문학과 교수님의 부탁으로 미국의 여성 작가 도러시 캔필드 피셔의 단편소설 「한 철학자의 초상」을 번역하였다. 이 번역 작품은 영어를 전문으로 출판하는 회사에서 당시로서는 야심차게 6권으로 기획한 『현대미국문학전집』(1971)에 실렸다. 물론 교수님의 이름으로 실렸고 ‘유령 번역가’인 나는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번역한 것을 여러모로 손 보셨을 것이므로 교수님 이름으로 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나는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한 심정에는 변함이 없다.

대학원을 막 졸업한 뒤 나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 「호루라기」에 관한 일화를 뽑아 번역하였다. 어린 시절 그가 호루라기를 실제 값보다 네 배 값을 치르고 비싸게 샀던 일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프랭클린은 평생 이 날의 쓰라린 경험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오늘날에도 영어권에서는 “호루라기 값을 너무 비싸게 지불한다”는 말은 필요 이상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관용구로 널리 쓰인다. 이 번역은 당시 월간 교양잡지 《샘터》에 실렸다. 이 잡지는 당시 꽤 인기를 끌고 있던 터라 아마 많은 사람이 이 글을 읽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비록 ‘비공식’으로나마 번역가로서 이름을 올린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그 무렵 나는 영문학자가 되려고 했을 뿐 전문 번역가가 되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유학을 거의 마칠 즈음 나는 다시 번역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영문학 그 자체를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어딘지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문학을 연구하되 두 가지를 염두에 두려고 하였다. 그중 하나는 영문학 전공자로 그동안 공부한 서구 이론을 방법론으로 삼아 한국문학 작품을 좀 더 새롭게 읽어 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았거나 이미 번역되었어도 일본어 번역에서 부실하게 중역한 작품을 새롭게 번역하여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었다.

서구문학은 흔히 번역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서구 문학사의 첫 장은 번역에서 시작한다고 하여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번역이 중요한 것은 비단 서양문학뿐 아니라 한국문학을 비롯한 동양문학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번역은 한 문화권의 문학을 다른 문화권의 문학과 연결해 주는 교량 역할을 한다. 자칫 잊기 쉽지만 서양어의 대부분에서 ‘번역’이라는 낱말은 라틴어 ‘트란슬라티오(translatio)’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건너서’ 또는 ‘넘어’를 뜻하는 ‘트란스’와 ‘나르다’ 또는 ‘운반하다’를 뜻하는 ‘페로’가 결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트란슬라티오’란 떨어져 있는 두 공간 사이에 어떤 물건을 실어 나르는 행위를 가리킨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나룻배(번역)에 짐(원천 텍스트)을 싣고 강(언어의 장벽) 건너 쪽으로 옮겨 나르는 것과 같다. 

이렇듯 번역가란 육지와 육지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강을 건너게 해 주는 뱃사공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나룻배를 젓는 뱃사공이 없다면 한 육지에 머물 수밖에 없듯이 번역자가 없다면 한 나라의 문학은 민족문학의 울타리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영국의 번역 이론가 조지 스타이너는 “만약 번역이 없다면 우리는 침묵에 가까운 변방에 살고 있을 것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침묵 속에서 변방에 살지 않고 다른 나라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번역의 힘 때문이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나는 한편으로는 외국문학 이론을 소개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국문학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데 힘을 쏟았다. 영문학 중에서도 미국문학을 전공하는 나는 지금까지 영국문학보다는 주로 미국문학 작품을 번역해 왔다. 영국문학 작품을 번역한 것으로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유일하다.

영문학 외의 작품으로 나는 호메로스 이후 최고의 그리스 작가로 흔히 일컫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번역하였다. 내가 그리스 작품을 번역한 것은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한 작품이 아직 국내에 없었을 뿐더러 국내에 시판 중인 번역서는 그리스에서 프랑스어로, 다시 프랑스에서 영어로 3중 번역한 텍스트를 저본으로 삼아 번역했기 때문이다. 마침 미국에서 그리스문학 연구가가 이 소설을 새롭게 번역하여 출간한 참에 영어 텍스트를 저본으로 삼아 번역하고 싶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번역가는 중역은 말할 것도 없고 3중 번역을 반드시 피해야 할 함정이다.  

한편 나는 영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일과 더불어 번역 이론 쪽에도 관심을 두었다. 대학에서 번역 연구나 번역학을 강의하다 보니 번역 실제 못지않게 번역 이론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역 이론을 다루는 책과 함께 한국의 번역사를 다루는 책에 관심을 기울였다. 『번역인가 반역인가』(문학수첩, 2007),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2010), 『근대의 세 번역가』(소명출판, 2010), 『번역의 미로』(글항아리, 2011), 『오역의 문화』(소명출판, 1914) 등이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출간한 번역 관련서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성경의 뜻에 반하게 번역했다고 하여 화형당하는 프랑스 인문학자 에티엔 돌레(1509~1546)

지금 여기에 펴내는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글은 그동안 잡지나 학회지에 실리거나 강연에서 발표한 것들을 다시 고쳐 쓴 것이다. 첫 번째 글만이 이 책을 위하여 새로 쓴 것이다. 나는 첫 번째 글 ‘전문 번역가의 길’에서 번역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 번역가가 걸어야 할 험난한 길을 다루었다. ‘전문’이라는 관(冠)을 얹어 놓았지만 굳이 전문과 비전문을 가리지 않고 번역가라면 누구나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이다. 번역가가 평소 느낀 소감을 번역가 지망생에게 주는 ‘우정 어린 충고’라고 할 만하다. 

두 번째 글 ‘번역과 반역 사이’는 미국문학 작품, 그중에서도 흔히 ‘미국 현대문학의 삼총사’로 일컫는 F.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 번역과 관련한 글이다. 이 세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나는 호기심에서 다른 국내 번역가들이 어떻게 번역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예상 밖으로 졸역과 오역이 눈에 띄었다. 

방금 앞에서 언급한 벤저민 프랭클린은 집이 가난한 데다 형제들이 무척 많아 어린 시절 인쇄소의 식자공으로 잔뼈가 굵었다. 그래서 오자를 잡아내는 데 이력이 난 그는 『자서전』에서 오자가 없는 책이 없듯이 실수가 없는 삶도 없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는 프랭클린의 말을 한 발 더 밀고 나가 오역이 없는 번역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저런 이유로 원문을 완벽하게 옮기지 못한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 ‘완벽한’ 번역은 좀처럼 이룰 수 없는 드높은 이상일 뿐 번역가는 ‘차선’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번역을 하면 할수록 번역가란 ‘번역과 반역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와 같다는 느낌을 떨구어내기 어렵다. 

세 번째 글 ‘속담의 성차별과 젠더 번역’은 요즈음 첨예하게 부각된 젠더 문제와 관련한 번역 문제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최근 대중매체에서 ‘젠더’니 ‘성인지 감수성’이니 하는 용어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그만큼 현대 사회에서 젠더를 둘러싼 문제는 아주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었다. 흔히 언어는 ‘사상의 집’이라고 한다. 언어 중에서도 특히 민중의 지혜가 담긴 속담이나 격언에는 알게 모르게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주의와 그에 따른 성차별이 숨겨져 있다. 유능한 번역가라면 이제 젠더 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을 것이다. 

네 번째 글 ‘성경 번역에 대하여’에서 나는 제목 그대로 한글성경 번역과 관련한 여러 문제점을 다루었다. 이 문제는 그동안 기독교 연구가들과 성경학자들이 꾸준히 다루어 왔기 때문에 그다지 신선한 주제는 아니다. 다만 나는 문학 번역가의 관점에서 성경 번역 문제를 조심스럽게 취급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한글성경이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글성경이 시대의상 같은 낡은 옷을 훌훌 벗고 유행에 뒤지지 않는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을까? 젊은 세대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문체를 젊게 할 방법은 없을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성경 구절도 있듯이 한글성경이 시대에 걸맞은 번역으로 거듭 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는 몇 가지 제언을 하였다.  

세계문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21세기에 번역의 방법과 전략도 전과는 달라져야 한다. 1998년에 포르투갈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는 “작가들은 민족문학을 만들어내지만 번역가들은 세계문학을 만들어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세계문학 시대에 번역가는 이제 새로운 임무를 맡아야 한다. 번역가는 독자들이 민족문학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세계문학의 광장에 선뜻 나가 세계정신을 마음껏 호흡할 수 있도록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 인문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환경문학, 번역학, 수사학, 문학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해 온 인문학자다. 주요 저서로는 《궁핍한 시대의 한국문학: 세계문학을 향한 열망》, 《비평의 변증법: 김환태·김동석·김기림의 문학비평》, 《이양하: 그의 삶과 문학》, 《환경인문학과 인류의 미래》,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외국문학연구회와〈해외문학〉》, 《아메리카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눈솔 정인섭 평전》, 《하퍼 리의 삶과 문학》,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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