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악한 세계에서 생존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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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악한 세계에서 생존하는 힘
  • 노연숙 서울대·한국문학
  • 승인 2023.01.2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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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비평]

 

지난해 연말에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더 글로리〉(2022)가 연일 화제다. 전 세계 드라마 중에서 5위의 시청률을 보인 〈더 글로리〉의 화제성은 〈오징어 게임〉(2021)에 육박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학교 폭력(이하, 학폭)을 당했던 주인공이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학폭이나 복수라는 모티프는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다. 그렇다면 <더 글로리>의 특별함은 무엇일까. 명대사, 연출력, 연기력 등 모든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조화를 이룬 덕이 크지만, 무엇보다 연출에 있어서의 절제미가 우리를 미혹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드라마를 보기를 주저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우연히 보았는데 순식간에 몰입되고 말았다. <더 글로리>를 의도적으로 기피했던 이유는 학폭으로 연상되는 끔찍함을 상상하기 싫어서였다. 특히 피해자가 여학생이라는 점은 어떤 폭력의 형태이든 더 많은 불편함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함과 불편함을 각오하고 봤던 이 드라마에서 내가 본 것은 내쉬는 숨 하나하나마저 엄선한 절제미였다. 

피해자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예측할 수 없는 형태와 방식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폭력에 노출된다. 피해자인 ‘문동은’은 또래 집단에게 생활용품(고데기나 다리미)으로 맨살이 지져지는 고통을 당한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특별할 것도 없는 시간에 평범한 체육관에서 특별한 흉기도 아닌 일상적인 생활용품으로 고문을 당하는 형상은 학폭이 얼마나 일상에서 손쉽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 있는지, 언제 어디서나 출몰할 수 있는지, 친절한 미소가 언제든지 잔혹한 폭력으로 뒤바뀔 수 있는지를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필자가 각오한 것은 직접 고데기에 맨살이 닿아서 피부가 타들어 가면서 벌겋게 동시에 까맣게 변하고 핏줄이 터지면서 피가 넘치는 광경이었다. 필터링이 없는 방송으로 인하여 과격하고 과잉된 장면에 익숙해진 것도 있고,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인육을 물고 뜯는 좀비가 출몰하는 영상물에 길들어진 탓도 있겠다. 다행스럽게도 〈더 글로리〉는 이렇게 연상되는 장면들을 최대한 절제해서 깔끔하게 전달한다. 그렇다고 덜 잔혹한 것은 아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1996)에서처럼 잔혹한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소리로만 전달하기에, 잔혹함은 시청자의 머릿속에서 더욱 증폭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맨살이 타는 냄새를 맡을지도, 어른이 된 문동은이 트라우마로 인해 불판 위에 삼겹살을 굽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혼미하게 쓰러지고 말았듯이, 그러한 고통까지 공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더 글로리〉의 절제미가 주는 파급력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학창 시절 박연진이 동급생 문동은을 고데기로 학대하는 장면.  더 글로리 캡처

선을 넘은 폭력은 모든 생명체의 고유한 생명을 앗아간다. 생명체는 상상할 수 없는 강도의 모욕과 수치심 그로 인한 혐오와 증오심에 갇히고 만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숨을 쉬어도 죽은 것과 같다. 이 드라마는 이렇게 언데드한(살아있으나 죽어있는) 문동은이 한 줄기 빛도 없는 철저한 어둠 속에서, 백야가 소멸한 끝없는 극야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살아남았는가를 다룬다. 이로 볼 때 ‘살아남음’은 그 자체로 성공한 ‘복수’다. 패악한 세계로부터 밀려난 문동은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냄으로써 한 걸음 한 걸음씩 복수할 수 있는 자리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더 글로리>에서의 학폭과 복수는 진부하지 않다. 학폭을 당한 피해자를, 희생양으로만 귀착시키지 않고, ‘의로운 가해자’로 재배치하여 군더더기가 없는 복수를 기대하게 한다. 

그녀의 복수는 바둑을 통해서 미적으로 표출된다. 바둑은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상대방을 압박하면서 그가 만든 집들을 부수는’ 행위다. 바둑의 정의는 문동은이 꿈꾸는 복수의 정의와 상통한다. 문동은은 침묵 속에서 가해자를 압박하면서 점차로 그들의 성역을 부술 것이다. 학교, 경찰서, 교회 등 문동은은 어떠한 사회적 기관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했다. 반대로 가해자들은 재력으로 사들인 공권력으로 “사회적 약자”를 마음껏 유린했다. 이 맥락에서 문동은의 복수는 개인의 복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복수는, 소시민의 성실하고 정직한 삶으로 흔들 수 없는, 대물림된 재력과 권력을 발판으로 움직이는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도전이다. 

문동은은 패악한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가해자가 되기로 한다. 기꺼이 《선악을 넘어서》에서 니체가 꺼렸던 괴물과 싸우는 괴물이 되고자 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들과 결이 다른 괴물이 되고자 한다. 악독하지만 악독하지 않게, 저열하지만 저열하지 않게,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고결한 복수를 지향한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정도(正道)를 지킨다. 의를 위해서 불의와 싸우는 의로운 가해자의 길을 걷는다. 물리적인 폭력을 피하면서 약자들과 연대하면서 가해자들이 자멸할 수 있는 그물망을 촘촘히 제작한다. 일례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이모님이나 공장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와의 협업을 들 수 있다. 이들의 팀워크는 혼자서는 불가능한 부분을 가능케 하고 서로 간의 틈새를 메워준다. 

‘가해자들의 연대보다 피해자들의 연대가 분명 더 강할 것’이라는 문동은의 독백은 약자들의 연대가 김수영의 시 「풀」에서의 풀뿌리처럼 쉽사리 꺾이면서도 꺾이지 않을 질긴 생명력을 내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연대와 상생의 기조는 일종의 힘과 권력을 형성한다. 이를 버틀러의 말을 빌려서 “약한 존재들의 권력”(《비폭력의 힘》, 이하 쪽수만 표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에 포섭되지 않을 힘, 나아가 폭력을 방관하지 않고 대항할 수 있는 권력을 서서히 장악해가는 과정에서 서로 연대하는 모습은, 버틀러가 주장한 대로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서로 얽히고 얽혀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상호의존성”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폭력보다 비폭력을 택해야만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버틀러의 관점에서 가해자들은 결국에는 자신들에게 실(失)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폭력은 상호의존성을 망가뜨리기에 결국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 된다.’(41쪽)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폭력성은 결국 마이너스를 가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힘을 기른 문동은은 학교에서 불평등을 배웠지만, 교단에서 평등을 가르친다. “앞으로 이 교실에서는 다음 세 가지는 아무 힘도 없을 거야. 부모의 직업, 재력, 인맥.” 수저 계급론이 지배하는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견고한 계층이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무직이고, 가난하고, 사회적인 입지를 지니지 못할 때, 소위 돈 봉투를 건네지 못할 때, 겪지 않아도 되는 모멸감을 부당하지만 견뎌야 했다. 

주홍글씨처럼 낙인이 찍힌 문동은의 신체에 새겨진 흉터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추앙받는 생명들과 “애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생명들(사라진다고 해도 애도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듯 함부로 다루어지는 생명들)”(24쪽)로 분리하고 차별하는 패악한 세계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유일하게 평등한 것은 죽음뿐이다. 그러나 애도 받지 못하는 죽음이 있다는 점에서 이 죽음조차 불공정하다. 버틀러는 평등의 차원에서 애도 가치를 말한다. 애도는 응당 모두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평등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문동은은 사적인 구원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약자들이 누리지 못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 애도 가치를 입증하고자 한다. 그녀가 가해자에게 맨 먼저 던진 패는 학폭으로 죽은 시신이었다. 억울한 죽음으로 여전히 안치실에 있는 피해자는 애도 가치를 상실한 시대의 증좌다. 문동은은 피해자가 안식할 수 있도록 가해자의 자백을 듣고자 한다. 이것이 죽은 피해자를 방관했던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윤리적인 책무이며, 유일하게 남은 진정한 애도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애도를 가능한 애도로 바꾸는 일은 폭력에 맞서는 방법이자 가해자를 응징하는 복수의 본의다.

버틀러가 규정한 약한 존재들의 권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불필요해 보이도록 형상화되어온 사람들이 가치와 애도 가치를 인정받게 하는 권력”(39쪽)이 그것이다. 버틀러는 폭력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비폭력과 힘을 연결한다. 그렇기에 “공격적 비폭력”(43쪽)이 가능하다. 비폭력의 힘이야말로 “무수한 만행과 황당한 죽음의 시대”(233쪽)에 필연적이다. 문동은의 말처럼 우연은 단 한 줄도 없다. 

이렇듯, 본래는 버틀러의 《비폭력의 힘》에 관해서 쓰고자 했지만, 〈더 글로리〉에 심취해 버렸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버틀러의 논지를 어느 정도 서사화하고 시각화하고 있기에, 괜찮을 것이라는 변명을 에둘러 해본다. 버틀러는 책 표지에 명시된 것처럼 비폭력을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라 “저항의 실천”으로 재해석한다. 이 실천은 생존이나 시위로 형상화된다. 그러니 당신, “슬픔과 울분의 한복판에서”도 우리 모두의 고유한 “생존을 입증”(255쪽)하며 살아남아라. 언데드한 순간을 벗어나 살아있는 삶을 살아내라. 이것이 패악한 세계를 향한 ‘복수’며, 폭력에 저항하는 비폭력의 힘이다. 그러니 이 글은 읽은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살아있길 바라본다.


노연숙 서울대·한국문학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했고,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강의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동아시아 정치서사 연구》(지식산업사, 2015)가 있다. 최근 논문으로 〈조경란의 소설에 나타난 젠더 폭력과 우울한 비체의 문제 연구〉(《현대소설연구》, 202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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