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 법치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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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 법치국가
  • 이충진 한성대·철학
  • 승인 2023.01.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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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은 아마도 ‘공정과 상식’일 듯하다. 하지만 전임 정부 역시 ‘평등과 공정과 정의’를 국정의 핵심으로 삼았었으니, 큰 틀에서 보면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반면에 확실히 다른 것도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법치, 법치국가’이다. 

법치法治는 ‘법의 통치’ 또는 ‘법에 의한 통치’를 줄인 말이며, 따라서 법치국가란 ‘법치가 구현된 국가’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법치는 처음부터 권력자(통치자)의 행위와 연관된 말이며, 법치국가 역시 처음부터 권력자에게 적용되는 규범, 즉 권력자가 자신의 정치행위를 통해서 실현시켜야만 하는 일종의 이상 국가를 지칭하는 말인 셈이다. 

이러한 점은 역사적 관점에서도 확인된다. 서양의 근대 국가가 처음 등장하던 시기에 국가의 통치는 권력자의 자의恣意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인치人治는 피지배자인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생존을 좌지우지할 권력자의 결정을 전혀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다’라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이러한 불합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서양 근대인은 권력자에게 국민을 통치-지배하되 단 국민이 정한 규칙, 즉 법에 따라 통치-지배할 것을 강제했다. 그것이 근대 법치국가의 출발이었다. 

오늘날 법치국가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법에 의한 통치’와 ‘법의 통치’의 구분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먼저 ‘법에 의한 통치’는 법이 정치 행위의 수단이 된다는 의미이며, 이 경우 권력자는 법이 허용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뿐 그 법이 좋은 법인지 아닌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심지어 필요하다면 권력자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악법을 만들고, 그 악법을 통하여 악한 정치를 하기도 한다. 법에 의한 통치가 만연한 국가에서 국민은 독재 권력에 지배될 위험에 노출되고 권력자는 법기술자에 머물려는 유혹에 노출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론가들은 그러한 국가를 오래 전부터 ‘법률국가’라고 불러서 진정한 의미의 법치국가와 구분했다. 

‘법의 통치’가 실현된 국가, 법이 통치하는 국가가 법치국가이다. 법치국가에서는 법이 최고 권력을 가지며, 따라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권력자 역시 국민과 함께 법의 지배 아래에 있다. 이러한 ‘법 앞에서의 평등’이 법치국가의 최소한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법치국가에선 법이 지배자이고 정치가는 피지배자이다, 달리 말하면, 법이 정치가에게 ‘법치’를 명령하는 것이 법치국가이다. 이때의 법치란 입법 및 법집행에서 기계적 공정성과 형식적-절차적 합법성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법치국가의 입법자는 ‘자신이 만들려는 법이 진정 법다운 법인지’를 고민해야 하며, 행정-사법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법집행이 국민 기본권의 보장과 확장에 기여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법치국가에 걸맞은  정치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법치와 법치국가는 권력자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방지할 목적으로 등장했다. 이론적으로 보면 법치와 법치국가는 권력자에게 특정한 정치적 (권리가 아니라!) 의무를 부가하는 개념이다. 언어적으로 보면 ‘법치’와 ‘법치국가’는 그것의 수신자受信者가 국민이 아니라 정치가인, 그런 언어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모든 권력자는 법치와 법치국가를 자신의 입에 올리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국민을 향해 ‘준법’이 아니라 ‘법치’를 말하는 권력자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이거나 아니면 국민을 바보로 아는 오만한 자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정치행위가 법의 테두리 안에 있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정치가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런 정치가는 입으로는 법과 법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법을 정치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한 한갓 수단으로 삼는 자이다. 그의 발끝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는 이미 반세기 전 마틴 루터 킹이 분명하게 말했다: “히틀러의 만행도 당시엔 합법이었다.” 


이충진 한성대·철학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칸트 법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성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칸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로 서양 근대 법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Gerechtigkeit bei Kant, 『이성과 권리』,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회철학 이야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정언명령 ― 쉽게 읽는 칸트』, 『법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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