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과 비판적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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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과 비판적 시선
  • 송기한 대전대·현대문학
  • 승인 2023.01.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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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새삼 중용(中庸)이라는 말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중용은 학창시절부터 늘 들어왔던 말 중의 하나였고, 또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말 가운데 하나가 된 지 오래 되었다. 중용의 사전적 의미는 “넘치거나 부족함이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이다. 좋은 말임에 틀림이 없거니와 그래서 우리에게 강요되고 또 주입된 말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중용의 미덕이랄까 소중함을 알게 된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욕망하는 존재이기에 ‘부족함’보다는 ‘넘치는 상태’에 흔히 놓여 있는 까닭이다. 욕망은 세속적인 차원에서 보면 욕심에 해당한다. 물론 이 말이 무턱대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그것은 개인이 발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있으니 목표 의식이 생기는 것이고, 또 그것이 있기에 현재의 자아를 앞으로 전진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욕망이 부족할 때도 생기지만 그것이 넘쳐날 때 더욱 크게 일어난다. 욕망이 부족하다는 것은 뚜렷한 목표 의식의 부재와 연결되고, 그것은 곧 개인 혹은 사회에 있어서의 낙오를 의미한다. 반면 그것이 지나치게 클 때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의 영역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게 된다. 그럴 경우 그러한 행위들이 사회적 불온을 만들어내고, 궁극에는 개인의 비리나 사회적 병폐로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없어서도 안 되지만 있되 과해서도 안 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간의 지대를 설정하기가 무척 어렵기에 교육을 통해서, 수양을 통해서, 혹은 스스로의 다짐에 의해서 중용의 의미를 계속 환기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라는 이 중용의 미덕은 비단 인간 내부의 문제에서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양극화의 단면을 보면, 이 중용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느끼게 된다. 이 양극화를 만든 요인은 정치가 조성했고, 정치가가 그 환경에 불을 질렀다. 진영논리에 기대는 것만큼 자기편을 만드는 좋은 수단도 없을 것이다.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은 중간의 지대로 나오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한쪽 진영에 선 사람들은 다른 쪽 진영의 사람들의 말이나 마음에 공감의 지대를 결코 만들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신문이나 방송의 뉴스 역시 상대방의 논리에는 귀담아 듣거나 보려고 하지 않는다. 속된 말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진영 논리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편 사람이 어떤 범법자라고 해도 절대적으로 찬성하고 심지어 찬양해버린다. 이들의 정신은 이미 세뇌의 과정을 충분히 거친 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길을 잃어버렸다. 아니 그보다는 굳이 여기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논리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들은 휘발유처럼 날아가버린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패퇴뿐이다. 

자기 진영이 많다고 생각되거나 다른 진영에 비해 좀 더 우호적이라고 생각하면 정치 환경은 이를 자기화하고 이에 추종하고자 할 뿐이다. 범법자도 자기편이면 지지하는 형국이다. 그러니 이 논리가 극단화되면, 타 진영에 대한 외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거니와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진영의 사람들도 외면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현실이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에 대해 굳이 궁금해 필요가 없디. 이미 정답은 내려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중용의 미덕일 것이다. 한쪽으로 무비판적으로 경사되는 순간 피해는 이미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한다. “너무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비로소 많은 중간 지대가 형성될 터인데, 이런 현실이란 매우 요원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집단이 많아야 한 사회는 성공한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한 필요한 것이 바로 비판적 시선이다. 실상 중간지대의 형성과 비판적 시선의 등장은 동전의 앞과 뒤 같은 것이다. 이 시선이야말로 사회의 냉정한 감시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한쪽만의 시선을 의식한 정책이나 정치가 사라질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말이지만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고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 운명이 지향하는 곳 또한 모두의 유토피아를 위해서이다. 이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은 갈라진 진영으로서는 결코 가능하지가 않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감각과 비판적 시선이 보다 많이 형성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그것이 비록 어렵다 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믿고 사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꿈일 것이다. 인간은 꿈이 있기에 아름다운 존재이다. 누가 이 아름다운 꿈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송기한 대전대·현대문학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부 교수.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와시학 평론상, 대전시 문화상 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한국 현대 현실주의 시인 연구』, 『내 안의 그아이』, 『한국 근대 리얼리즘 시인 연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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