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너머의 철학 … 『순간의 존재』와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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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너머의 철학 … 『순간의 존재』와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에 관하여
  • 한상연 가천대·서양철학
  • 승인 2023.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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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순간의 존재: 하이데거 너머의 철학』,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 하이데거 너머의 철학』 (한상연 지음, 세창출판사, 각 256/264쪽, 2022.12)

 

필자의 최근 저술 『순간의 존재』(세창출판사, 2022)와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세창출판사, 2022)는 오랜 시간 동안 하이데거 존재론의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모색하며 필자가 수행한 성찰의 기록이다. 필자는 하이데거가 제시한 철학의 근본 규정으로서의 존재론을 그 자체로서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철학이란 근원적으로 존재론으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그 방법론적 토대는 현상학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필자가 말하는 하이데거 존재론의 한계란 존재론 자체에 결함과 한계가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실은 하이데거 자신이 존재론적으로 불철저하게 사유했음을 뜻할 뿐이다.

하이데거가 존재론적으로 불철저하게 사유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우선 인간 현존재의 윤리성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정밀한 사유의 부재에서 알 수 있다. 필자는 존재론이 일종의 윤리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존재의 가치로의 환원을 형이상학적 폭력의 근본방식이라고 보는 하이데거의 관점을 필자는 받아들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통념적 의미의 윤리학 역시 형이상학적 폭력의 표현 양태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윤리학적으로 인간이란 당위적 가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실존하는 존재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리학이 형이상학적 폭력의 표현 양태에 불과하다는 존재론적 진실로부터 존재론이 윤리 및 규범과 현존재 사이의 실존론적 관계를 간과해도 좋다는 결론이 따라 나올 수는 없다. 존재론이 반드시 해명해야 하는 문제 중 하나는 윤리 및 규범이 일상세계에서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위해 지니는 실존론적 의미의 문제이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일상세계란 언제나 이미 도구적 의미연관에 의해 점철된 세계이며, 인간 현존재의 일상적 자기 역시 언제나 이미 도구적 의미연관에 의해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일상세계는 언제나 이미 규범적 의미연관에 의해 점철된 세계이기도 하다. 이는 곧 인간 현존재의 일상적 자기 역시 언제나 이미 규범적 의미연관에 의해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유감스럽게도 하이데거는 이러한 자명한 존재론적 진실에 관해 거의 아무 언명도 남기지 않았다.

하이데거 존재론의 이러한 한계에 관해 필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논문과 강연, 저술 등을 통해 지적해왔다. 필자의 2017년 저술 『공감의 존재론』 및 2021년 저술 『시간과 윤리』 역시 언제나 이미 규범화된 세계로서의 일상세계에 대한 하이데거의 무관심이 존재론적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는지 지적하면서, 동시에 윤리적 규범성을 인간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방식의 하나로서 세세하게 밝혀내고자 하는 취지로 작성되었다. 『순간의 존재』와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사유의 기록이다. 이 두 저술은 존재론적 참혹함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현존재의 존재는 그 근원적 존재방식의 하나로서의 윤리적 규범성으로 인해 본래적으로 참혹하다. ‘참혹’이라는 말을 단순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존재론적으로 인간 현존재의 존재가 본래적으로 참혹하다는 것은 결코 염세주의적 세계관의 표현이 아니다. 실은 그 반대이다. 인간 현존재의 존재의 본래적 참혹함이란 존재의 가치로의 환원이라는 형이상학적 폭력에 맞섬이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규정이어야 함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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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너머의 철학 1’이라는 부제를 지닌 『순간의 존재』의 머리말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 책의 내용을 적확하게 이해한 독자라면 필자가 열어놓은 철학적 사유의 새로움을 직감하고 전율할 것이다. 여기서 ‘적확함’이란 단순히 논리적 의미연관을 적절하게 잘 해석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이 글을 통해 제기된 철학적 사유를 새로운 체험적 현실을 생성하는 정신적 감각기관으로서 이해하고 수용할 역량을 가리킬 뿐이다.”

인용문의 ‘새로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이해할 철학적 방식의 새로움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하나는 존재의 가치로의 환원이라는 형이상학적 폭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본래적으로 반(反)-윤리적인 것으로서 새롭게 되돌림이라는 뜻이다. ‘새로움’의 두 의미 모두 인위적으로 창안된 것의 새로움이 아니라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형이상학적 폭력에의 맞섬이라는 그 본래적이고도 근본적인 방식에 주목해서 재조명함의 새로움을 가리킨다. 『순간의 존재』를 적확하게 이해한 독자가 필자가 열어놓은 철학적 사유의 새로움을 직감하고 전율할 것이라는 말은 인간 현존재란, 모든 가치의 이념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의 존재자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참혹함을, 오직 참혹함만을, 그 자신의 본래적이고도 참된 존재성격으로서 지니는 그러한 존재자라는 것을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속에서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을 뜻한다.

‘하이데거 너머의 철학 2’라는 부제를 지닌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의 내용을 적합하게 이해한 독자라면 상기한 바와 같이 필자가 열어놓은 철학적 사유의 새로움을 직감하고 전율할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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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utreamont

필자는 ‘하이데거 너머의 철학’을 추구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작가들, 예술가들의 작품세계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와 로트레아몽, 보들레르, 에곤 실레 등이 필자에게는 중요했다. 이들은 모두 인간 현존재란 참혹함을 그 자신의 본래적이고도 참된 존재성격으로서 지니는 존재자라는 것을 직감했던 탁월한 사상가들이다.

『순간의 존재』에서는 주로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를 예시로 삼아 인간 현존재의 존재가 지니는 본래적으로 반(反)-윤리적인 것으로서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 하지만 『말도로르의 노래』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의 반(反)-윤리성을 일상적 윤리성에 대한 단순한 부정과 저항의 관점에서 파악하도록 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말도로르의 노래』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비교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 이유는 물론 모종의 윤리성을 존재론적으로 절대화하는 것에 있지 않다. 『말도로르의 노래』에서 필자가 특히 주목한 것 중 하나는, 아마도 로트레아몽의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인간 현존재의 존재의 근원적 규정으로서의 반(反)-윤리성이 통념적 의미의 윤리보다 고차원적인 윤리의 표현으로 오인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죄와 벌』을 비롯한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소설들은 『말도로르의 노래』와 일종의 길항작용을 하는 작품들이라고 할 만하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세계에서는 무한한 사랑과 용서, 연민 등에 대한 윤리적 확신의 이면에 윤리를 비롯한 모든 가치의 이념에 대한 결코 무화되지 않을 의심과 저항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Egon Schiele와 Mother with two children_ Egon Schiele 1915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에서는 에곤 실레와 보들레르의 작품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에곤 실레의 회화에서 필자가 특히 주목한 것은 에곤 실레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회화에서와 달리 에로스가 삶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보다 도리어 더욱 짙어지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왜 에곤 실레에게 에로스는 죽음 앞에서의 불안과 두려움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까? 에곤 실레의 에로스가 일상세계에서 터부시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에곤 실레의 회화는 자신의 에로스적 삶에 대한 부정과 무화의 근거로서의 일상적 규범에 대한 존재론적 맞섬의 표현이다. 필자가 에곤 실레와 더불어 보들레르에게 주목했던 것은 보들레르의 시 안에 일상적 규범이란 그 자체로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화하려는 은밀한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이,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간 현존재의 존재란 일상적 규범과의 맞섬을 통해서만 그 본래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명료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파리의 우울』 같은 산문 시집을 제외하는 경우 『악의 꽃』이 보들레르가 남긴 유일한 시집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일상적 규범의 관점에서 보면, 규범이 금하는 모든 것이, 규범이 금하는 것을 행하려는 인간 현존재의 모든 욕망과 의지가 다 악이다. 그러나 존재란 규범적 가치의 이념을 근원적이고 본래적으로 초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실은 일상적 규범 자체가 악의 표현인 셈이다.

 보들레르가 자신의 시 「알바트로스」(신천옹)를 통해 잘 드러낸 것처럼, 자유란 그 가장 고차원적이고 본래적인 의미에서 윤리 및 규범과 무관한 것이다. 알바트로스는 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서 드높은 창공으로 날아오를 뿐이다. 오직 이러한 의미의 자유의 증진으로 이어지는 규범만이 규범으로서 정당할 수 있다. 윤리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가 필요한 까닭은 인간 현존재란 일상적 규범과의 본래적 맞섬을 통해서만 이러한 의미의 자유를 보존하고 또 증진해나갈 수 있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가 실현될 자리 역시 실은 일상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 현존재란 일상적 규범과의 본래적 맞섬을 통해 일상적 규범 자체를 자유의 보존 및 증징을 위해 마땅하고 올바른 것으로 부단히 바꾸어나가야만 하는 역설적 책임을 떠맡고 있는 존재자인 셈이다.


한상연 가천대·서양철학

하이데거와 슐라이어마허를 함께 전공한 철학자. 독일 보쿰대학교에서 철학, 역사학, 독문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교에서 철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 한국현대유럽철학회 회장 및 한국하이데거학회 회장. 철학과 예술, 문학은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가천대학교에서 예술철학, 문화철학, 종교철학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희망철학연구소에서 여러 철학자와 함께 인문학 살리기, 민주주의교육 등과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시간과 윤리』, 『철학을 삼킨 예술』,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기쁨과 긍정의 종교』, 『공감의 존재론』, 『문학과 살/몸 존재론』, 『그림으로 보는 니체』,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등이 있으며, 희망철학연구소의 철학자들과 함께 일반 시민을 위한 여러 철학교양도서를 공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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