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단편집, 『저주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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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단편집, 『저주토끼』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3.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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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2017년에 출간되어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지명되면서 유명해진 책이다. 한번 읽어 보아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독서 모임에서 한 분이 강력 추천하여 함께 읽게 되었다.

기묘한 책이었다. 어디선가 접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단편들이 많았다. <저주 토끼>, <덫>, <흉터>는 한국 전래 동화를 연상시켰고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신밧드가 등장하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떠올리게 했으며 <차가운 손가락>, <재회>, <즐거운 나의 집>은 심령 영화를, <안녕 내 사랑>은 과거의 SF 인공지능 영화를 기억하게 했다. 이 모든 장르가 내가 평소에 즐겨 접하지 않는 것이어서 더 기묘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가장 기억에 오래 남은 단편,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분 나쁜 느낌이 질기게 남아버린 단편은 <머리>였다. 때마침 내가 양변기 부속을 교체하고 있었던 게 원인인지도 모른다. 십년을 훨씬 넘은 양변기 부속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겼고 검색을 좀 해보다가 직접 교체하기로 했다. ‘매일 쓰는 양변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도는 알아야지.’라며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걸림돌이 여러 개 나타나면서 며칠을 끙끙거렸다. 그 동안 투피스 양변기의 물통 부분은 분리된 상태였고 검은 구멍이 드러나 있었는데 하필 <머리>가 양변기에서 솟아오르는 존재를 그린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 존재는 여자가 ‘양변기 속에 버린 빠진 머리카락과 배설물, 뒤를 닦은 휴지 등으로 생겨난 존재’로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흐릿한 형체이던 모습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분명해져 나중에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세상에서 살아야겠다면서 여자를 양변기 안에 처박아 넣어 버린다.

‘대체 이 뜬금없는 이야기는 뭐지?’ <머리>를 읽자마자 이런 의문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는 문학을 읽으면서 어떤 ‘뜬금’을 바라는 것일까? 나는 내게 주어진 여러 상황이 조건 지어 준 특정한 삶을 딱 한 번 살다가는 존재이기에 문학을 통해 다른 삶을 간접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 간접 경험은 내 삶을 다른 각도에서 더 넓게 바라보게 하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 가능성을 높인다. 한 마디로 나는 삶과 세상을 더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문학을 읽는다.

그렇지만 『저주토끼』를 읽으면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복수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라는 작가의 말에도 공감하기 어려웠다. 단편들 속의 세상은 내가 살아가는 곳과 너무 동떨어진 상상의 공간으로 보였던 것이다. 『저주토끼』를 비롯한 이른바 장르 문학에는 다른 지향점이 존재하는 것인지, 혹은 동일한 지향점이 존재하나 내가 미처 잡아내지 못한 것인지는 차차 규명해야 할 문제로 남은 듯하다.

한 가지 덧붙여둘 생각거리도 있다. 표제작인 <저주 토끼>를 비롯해 한국 전래 동화의 요소를 상당 부분 따온 몇몇 작품에서 얻은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전래 동화를 읽은 셈이었는데 복수가 가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자녀나 손자녀 세대로 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저지른 몹쓸 짓이 아무 것도 모르고 태어난 후손들에게 화를 입히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읽었던 전래 동화들에도 그런 얘기가 많았다. 예전에는 별 의문을 갖지 않았지만 이제는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변한 건지, 시대가 변한 건지 이 역시 다시 고민해봐야겠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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