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노역형, ‘도형(徒刑)’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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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노역형, ‘도형(徒刑)’의 실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3.01.14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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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오늘날의 징역과 유사한 형벌, 도형

조선시대의 형벌의 종류는 크게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 다섯 가지인데, 이를 오형(五刑)이라 부른다. 태형과 장형은 매질을 가하는 신체형인 반면, 도형과 유형은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종의 자유형이다. 이로 볼 때 도형과 유형은 현재 교도소에 가두어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징역, 금고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조선의 감옥은 미결수를 가두는 곳으로 형이 확정된 기결수를 징역살이시키는 곳이 아니었다. 따라서 도형과 유형은 감옥살이 대신 먼 곳으로 내쫓아 정해진 구역 밖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의 형벌이다. 이 중 유형은 우리에게 익숙한 유배형을 말하는데, 형기는 종신이었다.

 

조선말 화가 김윤보가 그린 조선시대 옥중 죄인의 모습. 왼쪽의 간수 두 명을 제외하고 그림 속 인물들은 옥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모두 미결수라 보면 된다. 『사법제도 연혁도보』 수록.

그럼 도형은 어떤 형벌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이다. 태형, 장형보다는 무겁고 유형보다 가벼운 도형은 죄인을 먼 곳으로 내쫓아 일정 기간 관아 등에 배속하여 노역(勞役)을 시키는 형벌이다. 노역 기간은 1년, 1년 6개월, 2년, 2년 6개월, 3년 등 다섯 등급으로 나뉜다. 노역형이라는 측면에서 지금의 징역과 유사하면서도 당시 실제 집행 양상을 보면 오늘날과 여러 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인 독특한 형벌이 바로 도형이다.


어떤 노역에 종사했나?

그렇다면 도형에 부과된 노역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 『대명률』에는 도형에 처해진 자들에게 염장(鹽場)에서 소금을 굽게 하거나, 철야(鐵冶)에서 쇠를 만지는 노역을 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개 조선에서는 각 관청에서 수위 역할을 하는 청지기[廳直]이나 종이를 두들겨서 반듯하게 만드는 도침군(擣砧軍) 등 관아의 잡역부로 일하게 하였다.

예컨대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돌아가신 국왕 문종의 병환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로 내의원 의관(醫官) 전순의(全循義)을 전의감(典醫監) 청지기로 배속한 사례가 있다. 이보다 십여 년 뒤인 1464년(세조 10)에는 종친을 치료하라는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관 송첨(宋瞻)을 사헌부 청지기로 충당하였는데, 같은 해에는 환관(宦官) 이득수(李得守)·조언(曹彦)·김말생(金末生) 등이 국왕의 결재가 난 문서를 제때 해당 관청에 전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지서(造紙署)의 도침군으로 정해서 종이 만드는 노역을 시켰다.

 

대동여지도의 일부. 위로는 한강이 좌우로 흐르고 있으며 한양 남쪽 과천, 광주 일대가 보인다. 가운데에는 역참의 하나였던 양재역이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이 밖에도 역일수(驛日守)에 배속시키기도 했는데, 이들은 역참에 소속된 아전들의 노역을 보조하는 일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시대 역참(驛站)은 국가 공문서나 긴급한 군사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또는 물자 운송 등을 위해 설치된 교통 통신의 거점이었다. 세종대 이후 역참이 쇠락하여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도형 죄수를 역일수로 삼아 역에서 노역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역일수 일은 왕명을 받들고 왕래하는 사신들을 맞이하거나 배웅할 뿐만 아니라 각종 잡역에도 동원되었기 때문에 앞선 청지기나 도침군에 비해 노역 부담이 훨씬 가중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초에는 역참이 충실해질 때까지 임시 조치로서 시작된 도형 죄수의 역일수 배속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편 관리들의 경우는 죄를 지어 도형에 처해질 경우에도 앞서 살펴본 역일수를 시키지는 않았다. 대신 봉수군(烽燧軍)이나 정료간(庭燎干)으로 배속하여 일을 하도록 했다. 원래 봉수군은 변란 따위를 알리기 위한 시설인 봉화(烽火)의 봉홧불을 맡은 군사들로 힘든 고역이었으며, 정료간은 관청에서 야간에 잔치를 거행할 때 마당에서 횃불을 밝히는 잡역부를 말한다. 세종 때 함경도 의천군에 부임한 이진(李震)은 부임지에서 도죄(徒罪)를 범했다는 이유로 경상도 영해부의 정료간에 정역된 사례가 보이며, 마찬가지로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에 배속된 정여창(鄭汝昌) 또한 중앙관원이 찾아오면 홰를 잡고 대기해야 하는 수모를 견뎌야 했다.

 

경남 함양의 정여창 고택 전경.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 관아에서 잡역을 수행해야 했다.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제공.

백의종군도 도형의 일종

앞서 살펴본 일반적인 도형은 형기가 1년부터 최대 3년까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노역형의 형태를 띠면서도 종신형이라는 특징을 가진 형벌이 있었으니 충군(充軍), 위노(爲奴)가 그것이다. 

먼저 충군(充軍)이다. 명률에서는 군관, 군인이 도류(徒流)의 죄를 범한 경우 도형, 유형 형벌을 면제하고 말단 군졸로 충당시켰다. 이 충군의 제도를 조선에서도 준용하였는데, 조선에서는 궁중에서 숙위하는 금군(禁軍) 내지 무반(武班) 관직을 가진 자를 지방군의 평범한 군인으로 강등시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위 백의종군(白衣從軍)이 바로 충군인 셈이다.

1455년(단종 3) 서울의 고급 시위병인 갑사(甲士) 왕상덕(王尙德)이란 인물이 다른 사람의 처와 간통한 죄가 적발되어 갑사에서 쫓겨나 자신이 사는 고을의 군역(軍役)을 지는 처지로 전락한 사례가 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 장군도 1587년(선조 20) 함경도의 만호(萬戶)로 있을 때 오랑캐에게 패배했다는 이유로, 정유재란 때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를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백의종군하였다. 이 백의종군이 도형의 일종으로 바로 충군을 의미한다.

 

1576년(선조 9)의 이순신 무과 합격증. 이후 이순신은 두 차례에 걸쳐 말단 군졸로 편성되는 백의종군의 벌을 받았다. 현충원 소장.

위노(爲奴)는 문자 그대로 죄를 지은 자를 노비로 만들어 사역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영속관노(永屬官奴)라 불렀다. 대역죄인의 나이 어린 아들이나 여자 가족들의 경우 죄인과 함께 죽이는 대신 지방 관아의 관노비(官奴婢)로 배속시켰는데, 그 사례는 적지 않다. 관노비 신분이 된다는 것은 순식간에 사회의 가장 말단의 지위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점에서 위노의 처분은 노역형 중에서도 가장 중한 형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직도 불분명한 도형의 실체

지금까지 조선시대 형벌 가운데 노역형의 특징을 지닌 도형에 대해 알아보았다. 요즘의 유기징역처럼 1년부터 3년까지 형기가 있는 도형과 함께 이보다 무거운 종신 노역형이라 할 수 있는 충군, 위노까지도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노역형하면 대개 감옥 시설에 수감되어 팔, 다리에 수갑을 차고 간수의 감시를 받으며 강제노동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떠올리기가 쉽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노역형인 도형은 이와는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도형의 실체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가 되면 도형에 처해져도 노역을 하는 대신에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내기도 했으며, 정해진 형기가 지나도 석방되지 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도형이 유형과 별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노역형의 형태를 지닌 도형이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어떻게 운용되었지는 향후 밝혀야 할 숙제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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