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지식의 창고, 왕실 서재에 묵혀 있던 중국책을 꺼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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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지식의 창고, 왕실 서재에 묵혀 있던 중국책을 꺼내다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3.0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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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고종, 근대 지식을 읽다: 집옥재(集玉齋) 소장 중국 서적 12종 해제 | 윤지양 지음 | 산지니 | 333쪽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集玉齋)에 소장됐던 중국 서적 12종을 선별해 소개한다. 고종이 왜 이 책들을 구입했고 무엇을 읽어냈는가를 탐구하며, 고종의 개화사상을 연구하는데 구체적 단서를 제공한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됐다. 먼저 1부는 서양의 근대 지식을 담은 서적을 설명한다. 『광석도설』 은 광물학 입문서로서 광물의 분류와 종류별 형태 및 특징을 그림을 곁들여 간결하게 설명한 책이며, 『측지회도』는 중국 최초로 서양의 삼각측량과 사진 연판 인쇄를 소개한 번역서다.

『화형도설』은 정육면체, 원통, 원뿔 등 입체 도형을 그리는 방법을 예시를 따라 그리면서 익힐 수 있도록 설명한 교재이고, 『논화천설』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 교재로, 주로 연필이나 펜을 사용해 정물화나 풍경화를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도록 했다. 고종은 이 책들을 통해 광물학, 측량학, 도학(圖學) 등 최신 근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2부는 서양의 군사학 및 중국 내외의 전쟁을 다룬 서적을 다뤘다. 『영루도설』은 보루를 축조하는 방법을 서술한 책으로, 유럽의 유명한 군사 건축가의 저술을 번역했다. 『극로백포설』은 당대 최고의 대포인 독일의 크루프포의 사용법을 설명한 책으로, 크루프 사에서 제작한 소개 책자를 번역한 것이다.
『회도월법전서』는 베트남의 종주권을 놓고 청나라와 프랑스 간 벌어졌던 청불전쟁 관련 기록을 엮었다. 『보법전기』는 보불전쟁과 관련한 자료를 엮고 논평을 더해 편찬한 책으로, 중국인이 편찬한 최초의 유럽전쟁사이다.

3부는 상해의 풍경과 삶을 다룬 책을 보여준다. 『신강승경도』는 중국에서 석인본으로 출간된 최초의 풍경도책으로, 근대 도시 상해의 다채로운 풍경을 담고 있다. 청대 소설 『홍루몽』의 등장인물을 담은 화보 『증각홍루몽도영』에 수록된 삽화를 통해서는 당시 상해에서 유행한 최신 화법을 볼 수 있다. 『후요재지이도설』은 여러 기이한 사건과 인물의 이야기를 실었고, 『해상중외청루춘영도설』은 상해 기녀들의 사연과 일상을 담았다. 상해의 선진적 출판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삽화도 다량 수록됐다.

그간 고종의 개화 사상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이뤄졌지만, 정작 그러한 사상 형성과 실천을 가능하게 한 지식의 근원, 즉 그의 독서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다룬 적이 없었다. 집옥재에 소장됐던 1900여 종의 중국 서적에 대한 일반적 고찰은 있었지만 각각의 서적에 대해 면밀하게 탐구하려는 시도는 드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책에 담긴 각각의 서적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고서에 대한 식견을 넓혀준다. 나아가 근대 전환기 지식 전파의 주요 매체였던 서적 인쇄, 유통, 번역에 대한 설명과 유럽 전역에 출판혁명을 가져온 석판 인쇄술에 대한 서술은 근대 출판문화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 국내의 서지학 연구와 한국 근대 지식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에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시기 국내에 유입된 중국 서적에 대해서는 국내 학계에서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문학계에서는 1차 문헌 발굴과 해제보다 문헌에 대한 해석을 중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고, 서지학계에서는 19세기 중엽 이후에 나온 중국 서적보다 그 이전 시기의 목판본과 조선 판본에 더 큰 관심을 뒀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지식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던 근대 전환기 중국 서적의 유통은 동아시아 지식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당시 국내에 유입된 중국 서적을 면밀히 분석하는 것은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지식 유통의 지형도를 파악하고, 한국 근대 지식의 유래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이 책은 고종이 구입한 중국 서적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것이 국내에 근대 지식이 유입되는 중요한 통로였음을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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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mun 2020-03-09 18:23:24
책 앞부분에 서지학 관련 기초 상식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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