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과 철학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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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과 철학의 만남
  • 조성환 원광대학교·한국철학
  • 승인 2023.01.08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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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 (조성환 지음, 모시는사람들, 304쪽, 2022.12)

 

한국철학의 정체성

한국철학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중국철학과 어떻게 다른가? 전통 시대에 한국철학은 전부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내가 박사과정 시절에 한국철학 연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 받았던 질문이다. 대학원에서 같이 중국사를 공부했던 선배의 ‘도발’이라서 더 충격적이었다. 그 뒤로 내 머릿속에서 이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난 10년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맨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 나온 『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은 그 노력에 대한 세 번째 결과물이다. 이전에 쓴 『한국 근대의 탄생』과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종합한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철학의 정체성 물음”을 생각하는 데 있어 방법론상으로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은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의 지도교수였던 고바야시 마사요시(小林正美) 선생의 연구였다. 선생은 수업 시간에 종종 “중국에 소승불교가 아닌 대승불교가 유행한 것은 유교(儒敎)라는 토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교 사상이 희박한 동남아시아는 소승불교가 성행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주지하다시피 유교는 백성의 교화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정치철학이다. 대승불교 역시 개인의 해탈보다는 중생의 해탈을 우선시하는 불교이다. 이런 사상적 유사성이 중국에 소승불교가 아닌 대승불교를 유행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귀국한 뒤에 탐독한 시카고대학의 브룩 지포린(Brook Ziporyn) 교수의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중국 불교사상가 승조(僧肇)에 대해 쓴 논문에서, “인도불교에서의 무(無)는 유(有)를 배제하는 무(無)인데 반해, 중국불교의 무(無)는 모든 유(有)를 포용하는 무(無)이다. 그리고 이런 변용을 일으킨 것은 인도불교를 수용할 당시 중국에 노자나 장자와 같은 도가(道家)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주지하다시피 노자와 장자는 비움의 철학을 전개한 철학자들이다. 마치 그릇이 비어야 물건을 담을 수 있듯이, 마음이 비어 있어야 타자를 수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철학이 승조의 불교철학에도 보이고, 그것이 인도와는 다른 중국불교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고바야시 교수와 지포린 교수의 분석은 외래 사상을 수용하는 데 있어 수용자의 지적 풍토가 모종의 변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철학을 연구할 때 단지 ‘철학’이라는 보편적 범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고, ‘중국학’이라는 토대 위에서 전개된 ‘철학’으로 보아야 ‘중국철학’ 연구가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중 비교철학의 시도

그렇다면 이러한 시각을 중국과 한국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즉 인도와 중국의 사유 방식의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중국철학을 연구하듯이, 한국과 중국의 사유 방식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한국철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래에 중국과 서양을 비교하는 ‘동서비교철학’에 대해서 일종의 ‘한중비교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알기 쉬운 예 중의 하나가 원불교이다. 원불교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탄생한 자생불교이다. 여기에서 ‘자생불교’라고 한 것은, 종래와 같이 중국에서 수용한 불교 경전을 바탕으로 불교를 연구하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소태산 박중빈’이라는 창시자의 생각과 언행을 문자화한 독자적인 경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런데 원불교의 최고 교리는 “모든 것이 은혜이다”는 사은(四恩) 사상이다. 즉 천지만물과 사해동포가 모두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는 은혜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불교 교리와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불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일체개고(一切皆苦)”인데, 일체개고는 “모든 것이 고통이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를 ‘해탈’이라고 한다. 그런데 원불교에서는 정반대로 “일체개은(一切皆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를 강조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 세계에 대한 초월이나 거리두기보다는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반전’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이야말로 ‘한국학’의 과제일 것이다. 원불교의 은(恩) 사상은 고바야시 교수나 지포린 교수식으로 말하면, 인도불교가 중국에 건너와서 현실긍정적인 불교로 변용되고, 그것이 다시 한국으로 건너오자 보다 현실긍정적으로 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한국인의 특징은 도덕지향성에 있다”(『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고 했던 오구라 기조 교수의 분석을 염두에 두면, 도덕을 강조하는 풍토 위에서 탄생한 불교이기 때문에 은혜와 감사가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원불교의 탄생은 현실긍정과 도덕지향의 한국학이 인도 및 중국 불교와 만난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한국문화의 혼종성

이런 관점에서 이번 책에서 선택한 키워드는 “하늘, 종교, 실학, 개벽, 도덕, 생명”이다. 이 개념들은 모두 중국철학에 나오는 개념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에 오면 강조점이 달라지거나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가령 실학에서는 ‘실심(實心)’이 가미되고, 종교에는 ‘포함’(타종교에 대한 수용)이 강조된다. 근대에 오면 개화에 대해 ‘개벽’이 대두되고, 도덕의 영역이 만물로 확장된다(동학의 경물敬物). 현대에는 생명과 평화가 결부된 ‘생명평화’ 개념이 탄생하고, 그것이 촛불혁명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기본 개념들은 모두 중국에서 기원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재조합되고 재해석되면서, ‘포함삼교’나 ‘실심실학’ 또는 ‘생명평화’와 같은, 새로운 철학 용어가 탄생한 것이 한국철학의 역사였다. 따라서 개념의 ‘근원’만 가지고 보면 한국철학은 새로울 게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의 전개나 운용의 측면까지 같이 보면 한국철학은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최치원이 신라 화랑의 풍류도를 설명하면서 소개했던 ‘포함삼교(包含三敎)’의 예를 들어 보자. ‘포함삼교’란 중국의 유교・불교・도교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 화랑의 풍류도라는 뜻이다.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중국사상은 애초부터 한국에 다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정반대로 유불도 삼교를 종합하고 절충한 것이 풍류도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사례가 한류의 성공이다. 전문가들은 K-POP의 특징을 ‘혼종성’에서 찾고 있다. 즉 K-POP에는 세계의 모든 장르의 음악이 경계 없이 녹아 있고, 바로 그것이 성공 비결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신라의 풍류도에 적용시켜 보면, 풍류도에는 “중국의 주류 사상이 모두 녹아 있고, 바로 그것이 한국철학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최치원은 지금의 K-POP과 같은 K-Philosophy로서 풍류를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포함지향적’ 경향은 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주변에 있으면서, 그들의 선진문명을 수용하여 자신의 문화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질적인 외래사상을 수용하려면 먼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비워’(虛無)내야 한다. 즉 어느 하나의 사상에 고착되거나 머물지 말고, 바람과 물처럼 자유롭게 사상과 철학을 넘나들어야 한다. 그것을 상징하는 개념이 ‘풍류’이다. 그래서 풍류는 자기만의 고유의 것을 고집해서,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하거나 우수성을 주창하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종래의 자신을 비우고 덜어내서, 거기에 새로운 타자를 수용함으로써 진화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풍류적 아이덴티티야말로 지난 2천여 년 동안 한국이 ‘동국(東國)’이라는 독자적인 문명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인류세 시대의 한국철학

이러한 문명의 방식은 한국철학의 또 다른 키워드인 ‘하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종교학자 박규태는 한국인의 하늘 관념을 “더 큰 것을 지향하는 성향”이라고 해석한 적이 있다. 새로운 사상체계가 들어오면 종래의 체계에다 그것까지 포함하는 더 큰 사상체계를 세우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래보다 ‘더 큰 하늘’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조선 유학에 적용해 보면, 가령 권근이나 퇴계 또는 다산과 같은 철학자들에서는, 성리학의 최고 개념인 리(理)나 태극보다도 천(天)이나 상제(上帝) 개념이 상위를 위치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성리학 전통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예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서는 하늘 관념이 최고 범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중국의 새로운 사상을 수용했기 때문이리라.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역시 동학과 서학을 모두 ‘천도(天道)’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도 하늘 관념으로 동학과 서학을 대화시키고 회통시키려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흔적은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에서 기획한 삼일독립운동으로 현실화되었다. 삼일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한 ‘종교연합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늘’은 한국철학을 가장 근저에서 떠받치고 있는 토대이다. 그리고 풍류와 하늘을 종합해 보면, 한국인들은 “없이(無) 계신 하느님(天)”(유영모)으로 살고자 한 사람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최제우와 동시대에 최한기는 서양의 과학을 수용하여 기학(氣學)을 창시하였다. 기학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도구를 모두 ‘기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파악한 새로운 시도이다. 인간의 활동도 기를 변화시키고 인간이 만든 기술도 기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학 체계에서는 전통적인 천인합일(天人合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천인기(天人器)의 합일’이 지향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조건”에 자연뿐만 아니라 ‘인공’도 포함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종래의 중국의 氣(기)적인 세계관에다 서양의 器(기)술 문명을 포함시켰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반면에 서구 근대적 인간관에는 인간이 기(氣)를 변화시킨다는 발상은 없었다. 단지 인간의 이성으로 기(器)를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진보적 세계관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후변화는 인간의 기(器)가 자연의 기(氣)를 변화시킨 결과이다. 인간의 기술이 초래한 자연의 기화(氣化)가 기후변화(氣候變化)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후변화 시대의 한국철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최치원 식으로 말하면, 그리고 K-POP의 성공을 참고하면, 한국의 기학과 동학, 중국의 삼교(유교+불교+도교)와 서양의 삼학(종교+철학+과학)을 포함하고 녹여낼 수 있을 때 인류세 시대의 K-Philosophy가 가능하지 않을까?


조성환 원광대학교·한국철학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계간 [다시개벽] 편집인. 서강대와 와세다대, 원광대에서 수학과 철학, 종교와 역사를 공부했고, 동학사상사와 지구인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 근대의 탄생》에서는 동학의 탄생과 전개를 ‘자생적 근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했고,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에서는 퇴계와 다산, 동학을 ‘하늘철학’의 전개 과정으로 서술했다. 《동학의 재해석과 신문명의 모색》(공저)에서는 토마스 베리와 해월 최시형을 ‘지구인문학’의 시선에서 비교했고, 《개벽의 사상사》(공저)에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님의 문학’으로 자리매김했다. 번역서로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인류세의 철학》(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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