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서구의 발명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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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서구의 발명품인가?
  • 전진성 부산교육대학교·독일 지성사
  • 승인 2023.01.0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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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인권의 발명』 (린 헌트 지음, 전진성 옮김, 교유서가, 316쪽, 2022.12)

 

이 책은 린 헌트(Lynn Hunt) UCLA 사학과 명예교수의 2007년 작 『인권을 발명하다. 역사적 접근 Inventing Human Rights. A History』(W. W. Norton & Company, New York and London)를 완역한 것이다. 2009년에 돌베개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 이후 절판되었다가 2022년 교유서가에서 수정·보완을 거쳐 재발간되었다. 

저자 린 헌트 교수는 미국 역사학회장을 역임하고 프랑스 혁명사 분야의 새로운 연구 경향을 이끌어온 권위 있는 역사가이다. 그녀의 학문적 지향은 국내에도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 등 그녀의 저서 및 편저 일부가 번역되고 소개되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대표적 편저의 제목에 따라 자주 “신문화사(the new cultural history)”로 분류되는 그녀의 연구들은 거대한 혁명과는 일견 무관해 보이는 일상의 흐름 속에서 혁명의 정치문화가 생성되고 뿌리내리는 방식을 규명했다. 이 책은 린 헌트가 그전까지의 오랜 역사연구를 통해 쌓아온 경험과 지식 그리고 방법을 ‘인권’이라는 시사적 주제에 적용한 결과이다.

이 책은 인권에 대한 한 편의 개론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권이나 천부인권 사상 등의 논리를 깊이 있게 천착하는 지성사 연구도 아니다. 이 책은 권리가 보편적인가하는 철학적 질문을 언제부터 사람들이 인권이 보편적이라고 믿게 되었는가라는 역사학적 질문으로 바꾼다. 여기서 인권은 미리부터 주어진 소여나 성취된 결과가 아니라 일련의 행위 과정으로 다루어진다. 저자는 “인간의 권리”라는 말이 불러일으킨 특별한 감정, 그 “부적과도 같은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과 정치 팸플릿을 포함하는 각종 책들, 초상화나 풍속화 혹은 시구(詩句)의 이미지들, 매너와 제스처, 심지어 관상학과 수상술 같은 관행들까지 일반인들의 반응과 수행성을 중심으로 추적하고, 또한 고문철폐 등 법률적 사안에 대한 논쟁, 몸에 대한 지각의 변화, 식민지 피지배자들의 절규 등등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낸다. 이 책을 이루고 있는 이와 같은 내용들은 역사가 헌트가 그간 오래도록 추구해온 담론사, 책의 문화사, 심리사, 이미지의 역사, 몸의 역사, 그리고 정치문화사의 궤적을 담고 있다. 그야말로 ‘신문화사’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이 18세기 서구의 발명품이라는 기본 논지로부터 이 책은 출발한다. 이 가정은 그 자체로는 별로 새로울 바 없지만 그것을 새로운 경험과 감정, 그리고 정치문화적 실천과 결부지어 해명한 점이 이 책의 고유한 성과이다. 1789년 프랑스 국민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1조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과연 합당한가? 본서의 저자에게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은 그다지 중요치 않아 보인다. 그보다 중요한 점은 경험적으로는 입증하기 힘든 이 주장이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자명하게” 여겨졌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자명성의 요구야말로 인권의 역사에서 핵심적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개인 마음의 변화가 연루된다. 어디선가로부터 새로운 감정이 샘처럼 솟아나 “개인은 자신의 신체를 소유하고 그것의 분리와 불가침성의 권리를 갖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에게서와 같은 열정, 감성, 그리고 동정심을 인정해주었다.”

저자는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라는 의식과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야말로 인권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자명하게 받아들이게 한 감정적 원천이라고 설명한다. 우선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부여받으려면 각자가 스스로 도덕적 판단을 행할 수 있는 분리된 개인들로 지각되어야했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자신을 떼어내어 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야했고, 이와 더불어 자기 신체를 완결적인 것으로 느끼면서 다른 신체와 명확히 분리시킬 수 있어야했다. 소설 읽기나 초상화 주문에서 명시적 표현을 얻은 하나의 개체로서의 인격, 즉 단독적이고, 분리되고, 특별하고, 독창적인 개인이라는 관념은 이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딜레마를 해결해야했다: 개인의 권리가 중요하다면 공동체는 그저 포기되어야 마땅한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 신체의 자기완결성에 대한 의식은 신체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고 이러한 원칙은 자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었다. 각자의 몸은 동등하게 소중하다. 그것은 같은 “골질”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잔혹한 형벌은 나에게서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고통을 타인에게도 줄 것이다. 이처럼 자율적이지만 타인에게 “공감(empathy)” - 18세기의 용어로는 “동정(sympathy)” - 할 능력을 갖춘 개인들의 존재야말로 공동체에 도덕적 자양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인권을 자명한 것으로 느끼도록 만들어준 자율성과 공감이라는 두 가지 감정적 원천이 항상 균형을 유지하지는 못했음에 주목한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래 인권 신장에 걸림돌이 된 것은 후자의 결핍이었다는 것이다. 세 개의 소설 작품,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1740)와 『클라리사』(1747-48), 장 자크 루소의 『쥘리 또는 신 엘로이즈』 (1761)를 거론하며 저자는 독자들이 전통적인 사회적 경계, 즉 귀족과 평민, 주인과 하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성인과 아동 간의 경계마저 넘어 자신과 무관한 등장인물들과 공감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인권은 오직 대중들이 타인들을 근본적으로 동등하게 생각하도록 배울 때만이 번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상상력은 번번이 장애물에 막히곤 했다. 미국 독립선언문의 발안자 토머스 제퍼슨은 노예소유주였고, 유럽에서 왕정과 종교적 억압, 고문을 폐지시킨 나폴레옹은 자국의 식민지에서 노예반란을 무참히 진압했으며, 「여성의 권리 선언」을 감행한 올랭프 드 구즈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인권이 보편적이라고 만방에 알렸던 당사자들이 스스로는 그다지 보편적 사고를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인권이란 철학자 제러미 벤섬이 비꼬았던 대로 “수사학적인 난센스, 호언장담의 난센스”에 불과했던가? 저자는 역사에 존재했던 세 개의 선언 - 미국 독립선언(1776),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 그리고 국제연합의 세계인권선언(1948) - 이 갖는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다. 이들 선언은 전통적 사고와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원론적인 주장을 펼쳤기에, 프랑스 선언의 경우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로부터 그 “형이상학적 추상(성)”을 호되게 비난받았지만, 바로 그러한 특징으로 인해 오히려 인권의 논리가 뻗어나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 선언의 추상적 보편주의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치적 토론의 공간을 열었다고 해석한다. 예컨대 고문과 잔혹한 형벌에 반대하는 운동은 1776년과 1789년의 선언을 통해 비로소 보편적인 인권의 대의와 결합되어 구체적인 입법 행위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저변에 존재하던 감정들이 선언을 통해 하루아침에 혁명성을 띠게 된 것이다. 새로운 권리는, 비록 그것이 곧바로 정치적 권리로 연결되지는 못했더라도 새로운 기회의 장을 열었고 그때까지 권리를 누리지 못하던 각종 집단들은 이 기회를 잡고자 분투했다. 결국 인권이란 ‘모 아니면 도’ 식의 명제는 아니었다. 저자는 “권리의 폭포수”, 또는 “권리라는 혁명적 논리가 뿜어내는 불도저 같은 힘”을 강조한다.

새로운 권리에 고무되어 스스로를 대변하며 동등한 인정을 요구했던 집단 중 저자가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바로 여성이다. 종교적 소수파, 무산자, 유대인, 흑인, 노예, 미성년자보다 여성의 권리가 더욱 늦게까지 등한시된 이유는, 저자의 시각으로는, 여성이 박해받는 소수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들은 수적으로 인류의 절반에 달하며 매일매일의 삶을 함께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존재로, 별로 요란한 박해를 받지 않았기에, 명확히 분리되고 구별가능한 정치적 범주로 “상상”되기가 좀처럼 힘들었다. 여성의 경우는 인권의 논리가 미리 정해져있다기보다 그때그때의 실천 양상에 따라 상이한 역사적 과정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추상적 원리란 상상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확대 해석할 여지가 있기에 다양한 실천을 거치며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들을 낳게 된다. “권리들은 과연 누가 그것을 가지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이 부단히 변화하기에 문제 제기에 개방적이다. 인권 혁명은 말 그대로 진행 중이다.” 

결국 저자는 인권을 인간 존재에 주어진 자연적 본성이 아니라 오로지 실천을 통해 획득되는 역사적 산물로 파악한다. 이 책은 대서양을 건너뛴 비교사적 접근을 통해 인권을 ‘역사화’한다. 물론 프랑스와 영미권의 담론, 그것도 주로 18세기 말~19세기 초엽의 담론들에 치우친 점은 이 책이 갖는 뚜렷한 한계이다. 비록 마지막 장에서 일종의 “연성권력”으로서의 인권 담론을 19세기 후반부에서 현재까지의 세계사적 흐름과 결부시켜 논하고는 있지만 하나의 스케치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이 다룬 범위만으로도 한 명의 역사가에게는 벅찬 과업이다.

이 책은 수많은 찬사와 함께 비판도 많이 받았다. 특히 지성사 연구자인 새뮤얼 모인(Samuel Moyn)의 비판이 날카로웠는데, 그에 따르면, 18세기에 등장한 인도주의(humanitarianism)는 혁명적 권리 요구와는 무관하며 헌트가 부각시킨 연민의 감정은 오히려 테러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19세기를 거치며 (인도주의적) 인권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폭력성과 연계되었을 뿐 20세기 후반에 전 세계적으로 폭발한 ‘인권혁명’과는 계보가 다르다. 따라서 ‘권리의 폭포수’나 ‘연성권력’이라는 헌트식 관점은 비역사적이라는 것이다. 모인은 우리 시대의 인권이 옛 혁명 전통이 아니라 오히려 그 폐허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옛 나치시절 유대인을 강제 추방하던 역인 푸틀리츠 거리(Putlitzstrasse) 전철역 철로 위의 다리 위에 세워진 홀로코스트 추모비(1987년 작) 사진: 필자 제공<br>
옛 나치시절 유대인을 강제 추방하던 역인 푸틀리츠 거리(Putlitzstrasse) 전철역 철로 위의 다리 위에 세워진 홀로코스트 추모비(1987년 작) 사진: 필자 제공

모인의 비판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저자 헌트의 전공 영역인 18세기 유럽, 특히 프랑스의 정치문화사에 큰 비중을 둔 이 책은 천부인권을 내세우던 당사자들이 인간 모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불편한 사실을 적시하며 각자의 권리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었음을 부각시키면서도 근대 서구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인권운동에 대해서는 그저 짧게만 언급하며 그나마도 서구적 가치의 확산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예컨대 한국의 옛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1990년대 이래 지난하게 벌여온 권리투쟁을 서구적 천부인권 개념의 연장, 혹은 이 책이 높이 평가하는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그리고 1948년 국제연합의 세계인권선언의 역사적 연장선 속에서 보아야할지는 의문이다. 지금의 인권과 그때의 인권은 과연 같은 개념인가? 우리 시대에 적합한 인권 개념을 찾기 위해 우리는 서구적 인권 개념의 요체를 계승해야 마땅한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인권 개념도 가능한가? 인권은 우리시대의 현실을 이해하고 변화시켜나가기 위해 여전히 유효한 개념인가?

이 책의 원 저작이 출간된 이후 십수 년 동안 전 세계는 인권의 확장은커녕 더욱 극심한 인권유린에 시달리고 있다. 온갖 가짜뉴스에 힘입어 이민자, 난민, 여성, 남성, 장애인,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전례 없는 사회적 혐오가 판을 치고 있다. 여기에 의외로 통상적인 인권 개념도 한몫 거들고 있다면 실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동안 오래도록 ‘인권’은 국민의 ‘주권’과 거의 동일시되어왔다.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얻지 못하는 한 인권은 유명무실해진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표현에 따르면, 인권이란 오로지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일뿐이다. 국법의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이방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권리는 그들을 가로막는 강고한 철벽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에서는 생략된 주제이지만 서구적 인권 개념은 근대 서구에서 발원한 국민국가를 정당화하고 그 주권의 경계 안에 머묾으로써 인간 모두의 권리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 충실하지 못했다. 심지어 인권은, 새뮤얼 모인의 지적처럼, 도덕적 명분을 내세운 정치적 테러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인권혁명’으로도 불리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인권 개념은 인간이라는 사실 외에는 어떠한 권리도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권리, 다시 말해 소속 여부와는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출생의 자격을 공유하는 미지의 타자에게 부여된 권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다수 국민의 권리이기보다는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보호되어야할 소수자, 약자, 이방인의 권리이다. 인권이란 한마디로 ‘권리를 결여한 사람들의 권리’다. 국제적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아무런 이념적 제어장치가 없는 국가 간, 개인 간 무한 경쟁의 시대에 처하여 기존의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그로부터 배제된 사회적 주변인과 공공적 폭력의 피해자, 민간의 인권단체들이 권리투쟁에 나섰다. 그것이 바로 ‘인권혁명’이다.

이 책은 비록 서구 학계에 고질적인 서구중심적 관점을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도록 지적인 영감을 제공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인권이라는 밑도 끝도 개념이 역설적으로 바로 그 모호함 덕분에 지구적 보편성을 획득해갈 수 있었다는 통찰이야말로 이 책을 다시 펼쳐들게 만드는 이유이다. 인권이라는 그치지 않는 ‘폭포수’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미지의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고취시켰다. 린 헌트 교수가 다른 권리들에 비해 하필 여성의 권리가 늦게 쟁취된 이유를 설명하며 강조하였듯이 권리의 쟁취는 결국 사회적·정치적 상상력에 의해 발동되는 실천적인 의지의 문제이다. 18세기의 서구인들이 구체제의 억압에 맞서 단순히 개인의 자유만이 아니라 그것과 공동체적 연대의 변증법을 성취했다면 이제 우리는 강고한 주권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국민국가 내의 시민권과 범인류적 연대의 변증법을 모색할 때다.


전진성 부산교육대학교·독일 지성사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독일 근현대 지성사와 문화사, 역사이론이다. 『서독의 구조사학』(독어본),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일역, 영역)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연구논문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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