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와 지구촌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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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와 지구촌의 미래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01.0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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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32강_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의 「에너지와 지구촌의 미래」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네 번째 섹션 ‘생존의 자유와 지구적 위기’ 제32강 이덕환 명예교수(서강대 화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에너지와 지구촌의 미래


이덕환 교수는 인류 문명의 원동력으로서 에너지가 “이제는 불평등과 빈곤을 부추기고, 국제 사회의 갈등과 불안을 증폭”시키며 에너지 안보와 에너지 정의가 큰 화두가 떠오르고 있는 현실의 일단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여전히 인류의 생존을 위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핵심 기술”임을 강조하면서 “에너지의 비효율적인 낭비”를 막는 것과 함께 “더욱 안전하고, 깨끗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 기술” 개발을 말한다. 보다 실질적으로는 생명과 문명의 원소인 탄소를 향한 지나친 악마화를 경계할 것, 그리고 기후 위기론과 관련해 호들갑스러운 대응 이전에 적응(adaptation)과 완화(mitigation)라는 관점에서 “지구 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로 “인류가 지속가능한 삶을 계속할” 방법의 모색을 이야기한다. 

 

지난해 12월 03일, 이덕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32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에너지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에너지에 의한 지구 환경의 오염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화려한 인류 문명의 발달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던 에너지가 이제는 불평등과 빈곤을 부추기고, 국제 사회의 갈등과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는 여전히 인류의 생존을 위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핵심 기술이다. 에너지의 비효율적인 낭비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더욱 안전하고, 깨끗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에너지 소비의 불균형도 해결해야 한다.

1. 에너지: 인류 문명의 원동력

에너지가 처음부터 인류의 생존을 위협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에너지는 인류가 지난 50만 년 동안 지구촌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해준 결정적인 기술이다. 18세기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에너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에너지가 국력의 척도가 되었다. 에너지 자원과 기술을 충분히 확보한 국가는 융성했고, 그렇지 못한 국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에너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인류가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게 된 것도 에너지 덕분이었다. 전통적인 임산(林産) 연료를 석탄으로 전환하기 시작하면서 인류 사회의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자동차, 선박, 비행기를 이용한 자유로운 여행과 운송을 가능하게 한 것도 석유와 천연가스 덕분이었다. 20세기의 대량 소비문화와 정보화 혁명도 깨끗하고 편리한 에너지 전달 수단인 ‘전기(electricity)’의 등장으로 가능해졌다. 이제 인류는 초연결, 초지능, 초융합의 ‘메타버스’가 지배하는 4차 산업혁명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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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에너지 안보와 에너지 정의

오늘날 에너지 자원은 국제적 갈등을 악화시키는 가장 심각한 요인이다. 이제는 식량과 마찬가지로 에너지가 국가 안보(national security)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해외에서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에너지 정의(energy justice)’가 새로운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누구나 적정한 가격에 신뢰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UN이 추구하고 있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의 일곱 번째 과제이다. 에너지의 보편화와 효율의 증대를 통해 지속가능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선진국의 20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은 저개발국들의 사정을 고려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에너지 정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먼 형편이다.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 식량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UN이 추구하는 SDG의 ‘불평등 해소’와 ‘기아(飢餓) 해결’이 ‘에너지 정의’와도 직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기후 위기도 에너지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과소비에 의해서 촉발되고 있는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국제적 합의를 실천하는 일이 절대 쉬울 수는 없다. 전통적인 화석 연료를 모두 포기하고, 깨끗하고 안전한 신재생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후 위기를 촉발시킨 선진국들의 ‘역사적 책임’도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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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현실적인 탄소의 악마화

탄소(炭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심각하다. 탄소가 심각한 기후 변화, 식량 생산 감소, 물 부족, 환경 파괴 등을 일으키는 지구 온난화의 원흉이라는 어설픈 주장이 놀라운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기후 변화에서 들먹이는 ‘탄소’는 화학에서 사용하는 원자 번호 12번의 ‘탄소’가 아니다. 오히려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는 악당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산화탄소’를 말한다. ‘탄소’와 ‘이산화탄소’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억지일 수밖에 없다. 탄소에 대한 거부감이 굴뚝과 배기구에 한정되어 있는 것도 심각한 왜곡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호흡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는 사실과 이산화탄소가 녹색식물을 먹여 살리는 소중한 식량이라는 중요한 상식은 애써 무시된다.

1) 탄소는 생명의 원소

탄소는 함부로 악마화할 수 없는 매우 소중한 원소다. 실제로 탄소는 생명의 원소다. 탄소가 없으면 생명 현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생명체의 조직과 기관을 구성하고, 복잡하고 정교한 생리 현상을 가능하게 해주며, 후손에게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모든 일에 탄소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2) 탄소는 문명의 원소

생명의 원소인 탄소는 인류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을 제공한 문명의 원소이기도 하다. 인류 문명의 근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화석 연료도 모두 탄소의 화합물이다. 정보화 시대를 가능케 한 전기도 대부분 석탄을 비롯한 화석 연료로 생산했다. 탄소를 이용해서 생산하는 에너지가 인류 문명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뜻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인류의 탄소 의존도는 더욱 빠르게 심화되었다. 20세기에는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고분자 합성 기술이 등장했고, 이제는 미래의 소재로 전망되는 탄소 기반의 첨단 나노 소재가 개발되고 있다. 탄소의 다양성을 활용하는 기술은 앞으로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것이 분명하다. 

3) 탄소 문화가 진정한 친환경

지구 온난화가 우리의 과도한 화석 연료 소비 때문이라는 지적이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경제, 사회, 정치, 문화적 문제가 탄소 때문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턱없이 부족한 억지일 수밖에 없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환경 문제를 소홀히 여기고 화석 연료를 마구 쓴 우리의 실수를 엉뚱하게 탄소의 탓으로 돌리려는 자세는 매우 비겁한 것이다.

탄소가 우리의 무분별한 소비와 낭비를 부추긴 것도 아니다. 화석 연료의 소비를 줄이고,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이면 반드시 지구 온난화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지구의 대기는 화학적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복잡계이고, 그런 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비가역적(irreversible)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대한 자연의 도도한 변화를 막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고 기술만능주의적인 착각일 뿐이다. 오히려 과도한 자연 의존도를 줄여 자연 생태계로부터의 자립을 꿈꾸면서 자연의 변화에 현명하게 ‘적응(適應)’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탄소는 우리가 거부해야 할 악(惡)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선(善)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탄소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화학을 포함한 현대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정체성 확인과 문명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 과학이 인간의 문제를 고민하는 인문, 사회, 문화, 예술과의 적극적인 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과 번영을 위한 새로운 ‘탄소 문화(carbon culture)’의 창달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막중한 시대적 당위(當爲)다. 특히 현대 과학과 기술의 가치와 성과를 분명하게 평가해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친(親)탄소적이고, 친(親)과학적인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3.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하는 노력

1) IPCC의 기후 위기론

세계기상기구(WMO)와 유엔환경계획(UNEP)이 1988년에 구성한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주장은 위협적이기도 하다. IPCC의 주장은 과학계의 자율적인 검증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국제연합의 합의 과정을 통해 도출되는 것이다. 그런 결론에는 상당한 수준의 불확실성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자연의 변화가 전문가들의 민주적 합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PCC의 경고를 무작정 외면해버릴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2) ‘홀로세’와 ‘인류세’

지구의 환경 변화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우선 지구의 역사에서 온난화와 같은 기후 변화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실제로 지구의 역사는 기후 변화의 기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지구의 역사에서 기후 변화가 일상이었다는 뜻이다.

지구의 기후가 끊임없이 변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태양의 활동, 지구의 공전 궤도, 지구 자전축의 기울어짐, 지구 자기장의 변화, 지각판의 움직임, 대형 화산과 산불, 해류의 변화 등이 모두 지구의 기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제 우리 인간까지 나서서 지구의 환경과 기후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우리가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걱정하는 진짜 이유는 그런 변화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전제로 하지 않은 대안은 의미가 없다. 온실가스 배출로 몸살을 앓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능력의 한계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IPCC의 주장처럼 우리가 심각한 온난화의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온난화를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는 일도 단순하지 않다. 맹목적인 ‘저탄소’나 ‘탈탄소’는 비현실적인 꿈일 수밖에 없다. ‘탄소중립’도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공기 중에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회수하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탄소의 화합물 중 에너지가 가장 낮은 이산화탄소를 포집(sequestration)하려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 에너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은 만만치 않은 과제일 수밖에 없다.

 

3) 기후 변화에 적응(adaptation)

탄소를 쓰지 않는다고 무조건 친환경적 선(善)이라는 인식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신재생 에너지에 의한 환경 파괴, 감당하기 어려운 대형사고, 식량 생산과의 경쟁으로 촉발되는 윤리 문제도 화석 연료에 못지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에너지 전달 수단에 불과한 수소를 친환경적인 청정에너지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책임한 것이다. 친환경을 앞세운 화려한 정치적 수사(修辭)에 현혹되어 어설프게 탄소를 거부하다가는 자칫 더 큰 재앙을 자초할 수도 있다.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후 변화에 순응해서 우리 스스로 ‘적응(adaptation)’하려는 노력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온대 지역에 위치한 우리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겨울이 짧아지고, 여름이 길어지는 아열대화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합리적인 변화가 필요할 뿐이다. 식생활부터 주거ㆍ생활 환경 모두 바꿔야 한다. 아열대 기후에 적합한 새로운 농작물도 개발해야 한다. 산업ㆍ에너지ㆍ환경ㆍ식량 정책도 완전히 새로 짜야 한다. 

4) 기후 변화의 완화(mitigation)

정부가 2020년 10월부터 무차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탄소중립’은 사실 IPCC가 강조하는 ‘완화(mitigation)’의 한 가지 방법론일 뿐이다. 대기 중에 배출되는 온실 가스의 양을 실질적으로 0으로 만들겠다는 ‘넷 제로(net zero)’를 말하는 탄소중립이 국제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가 아니라 절박한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이다. 탄소중립을 달성한다고 기후 위기가 해소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해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 IPCC의 입장이다.

정부의 강력한 탄소중립 정책은 결국 IPCC의 목표와 수단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본말(本末)이 전도된 기형적 모습인 셈이다. 기후 위기 극복이라는 목표는 탄소중립을 포장하기 위한 어설픈 수식어로 전락해버렸다. 물론 탄소중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국제 사회의 노력을 외면할 수는 없다. 

사실 탄소중립이 기후 위기에 대한 확실하고 완벽한 해결책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미 달아오른 지구의 대기를 다시 식히는 일은 간단치 않다. 단순히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줄인다고 대기가 식을 것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탓이다.

태양광이나 풍력과 같은 소위 무늬만의 ‘무탄소 전원’으로 전환한다고 기후 위기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탄소중립을 추진하기 위해서 도입한 새로운 에너지 생산 시스템이 생태계에 미치게 될 부하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구 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인류가 지속가능한 삶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4. 결론

탄소중립을 추진하는 속도의 조절이 필요하다. 정부는 중간 점검에 해당하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 감축 목표를 40%로 상향 조정했다. 고작 8년 남은 기간 동안 제철, 정유, 시멘트 등의 에너지 집약적 산업을 통째로 포기할 수는 없다. 제조업의 비중이 28.3%나 되는 우리에게는 지나치게 도전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탈원전’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도 필요하다.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을 조기 퇴출시키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탈원전이 ‘60년에 걸친 장기적 과제’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 저개발 국가의 입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는 우리 원전과 석탄발전 건설 기술을 폐기하겠다는 우리의 주장은 배부른 국가의 무모한 ‘갑질’이 될 수도 있다.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고, 온실가스 배출을 포함해서 환경에 대한 부담이 최소화되는 새로운 에너지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술 지향적인 자세가 절실하다. 지나친 환상은 과도한 공포만큼이나 경계해야 한다. 앞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있는 ‘미래 기술’을 핑계로 이미 완성되어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는 ‘현재 기술’을 폐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구촌의 현실이 암울한 것은 사실이다. 80억 명의 인류가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풍요, 평등, 자유를 누리게 된 부작용이다. 환경의 측면에서는 인구의 감소가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환경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이웃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인구가 감소하는 과정이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도 심각한 어려움이다.

결국 믿을 것은 우리 자신뿐이다. 인구의 증가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는 미래 기술의 개발과 제도의 구축에 더 많은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설픈 ‘친환경’과 ‘무공해’의 구호는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에너지와 지구촌의 미래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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