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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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가능할까?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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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설명하기: 자연주의적 접근 | 당 스페르베르 지음 | 김윤성·구형찬 옮김 | 이학사 | 278쪽

 

이른바 문화의 시대라고들 한다. 문화현상은 왜 그리고 어떻게 나타나는 것이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 당 스페르베는 이 책에서 이러한 문제의 근원에 접근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스페르베에 의하면 문화란 특정 시공간의 인간 개체군에서 비슷한 표상들이 일정한 빈도와 분포를 보이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문화를 설명한다는 것은 표상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나고 퍼져나가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이다. 문화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은 인간의 심리학적 차원과 생태학적 차원에 대한 지식을 이용한다. 사회적 영역을 심리학적 현상의 생태학적 패턴, 즉 표상 역학(表象 疫學, epidemiology of representations)이라는 용어로 재개념화하는 것이다.

문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가능할까? 마음과 문화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이 책은 표상 역학이라는 참신한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심리학과 인류학이 풀지 못한 마음-문화 패러다임의 세기적 난제를 자연주의적 진화이론을 통해 풀어낸다. 

인간은 물질로 구성된 뇌와 신체를 지닌 생물학적 존재다. 문화는 이 존재의 생각과 행동을, 즉 표상들의 연쇄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문화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제약하는 뇌와 신체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문화는 물질적 뇌와 신체를 지닌 생물학적 인간들이 생태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물질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문화 역시 자연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것이 바로 문화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이 요구되는 이유다.

지금까지 문화현상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에 대한 논의는 많았지만 인지적 요인과 진화적 요인에 대한 연구를 접할 기회는 비교적 적었다. 사회적 영역을 자연화하는 것은 인지과학 프로그램들과의 연속성을 확립하는 일을 포함하며,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문화에 대한 접근은 인지적 측면에서 다윈주의에 밀접하게 연관된다. 인간의 인지 체계와 의사소통이 문화의 변형과 안정화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며 문화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이 책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지식을 확립하는 데 커다란 지적 자극이 되어줄 것이다.

표상은 개별적인 뇌와 마음의 물리적 상태인 심적 표상(믿음, 상상, 의도, 선호 등)과 외부 환경에 물리적으로 구현되는 공적 표상(신호, 발언 텍스트, 그림 등)으로 구별된다. 개인의 심적 표상이 공적 표상으로 표현되면 그것을 지각하는 또 다른 개인들의 뇌와 마음에는 나름의 심적 표상들이 형성되며, 그것들은 다시 또 다른 공적 표상들을 외부 환경에 등장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인과적 연쇄 과정에서 표상들은 항상 변형되기 때문에 서로 닮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 복제 기술을 사용해 동일한 공적 표상을 많이 만들어서 퍼뜨리더라도 그것들을 접하는 사람들의 심적 표상은 결국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연쇄 과정이 계속되면서 서로 유사한 표상들이 많은 사람 사이에 퍼져 널리 분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전염병처럼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퍼지지만 오래가지 않는 표상의 분포를 ‘유행’이라고 부르고, 풍토병처럼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연쇄가 반복되고 안정적으로 지속하는 표상의 분포를 ‘전통’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이러한 표상의 분포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이 역학조사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표상 역학’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역학적 탐구가 가능한 대상은 광범위하다. 특정 개체군에 감염병이 유행하거나, 암환자가 갑자기 늘거나, 흰머리 젊은이의 비율이 증가하면 역학조사에 착수할 수 있다. 이를 더 확장하면 특정 개체군에 가짜뉴스가 널리 유행하거나, 케이팝 마니아가 갑자기 늘거나, 채식주의자의 비율이 높아지는 경우에도 일종의 역학조사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질병 역학에서 병리학적 지식이 필요하듯이 표상 역학에서도 인지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에서 상호 적합성의 관계를 수립한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문화의 진화적 본질을 설명하는 도구로서 이 책에서 제안하는 표상 역학의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 인지과학, 뇌과학, 진화심리학, 인간행동생태학 등의 발전으로 인류 문화의 여러 측면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더 풍부해지고 정교해질수록 이 제안은 더욱 세밀하게 검증되고 보완될 것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문화적 현상에 대한 표상 역학과 인지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나면 인간이 어떤 표상들을 더 선호하고 능숙하게 다루며 쉽게 재생산하는지, 그리고 왜 그런지를 더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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