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초암다실의 기원은 불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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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초암다실의 기원은 불교에 있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1.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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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암다실의 기원 | 노성환 지음 | 효림 | 208쪽

 

우리의 차 학계에서 일본과 관련하여 거의 정설화되고 있는 담론 하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 초암다실의 기원이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초암에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고무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편협한 애국주의가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여기에 대해 울산대 노성환 명예교수가 일본 초암다실의 김시습 기원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펴냈다.

노교수는 이 책에서 김시습의 기원론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김시습의 다실이 정확하게 파악되어야 하며, 둘째,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국내외의 자료가 제시되어야 하며, 셋째, 김시습 이전 일본에 초암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교수는 유감스럽게도 위의 담론은 이상의 세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 김시습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아 거처한 곳을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가 경주 남산 용장사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하더라도 그 당시 그의 초암이 어떻게 생겼는지 실체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명확한 것을 명확한 것이라 하며 다른 것과 비교할 수가 없다고 했다.

둘째, 일본의 초암이 김시습의 영향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국내외 어떤 자료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들고 있는 유일한 자료가 『매월당시집』에 수록된 「일동승 준장로와 이야기하다(與日東僧俊長老話)」라는 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김시습이 용장사에서 일본 승려 준초를 맞이하여 차 대접하며 쓴 시라고 생각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시는 김시습이 울산에 와서 쓴 시들 가운데 들어있는데, 즉, 「해연(海堧)」, 「도이거(島夷居)」 다음에 나오며, 그다음이 울산의 명소 「태화루太和樓」라는 시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용장사가 아닌 울산에서 쓴 것이며, 또 「도이거」가 왜인들이 사는 염포에 관한 시이므로, 김시습은 염포에서 일본인 승려를 만나 차를 마셨다. 그러므로 그곳은 김시습의 거처가 아닌 일본 승려가 머무는 곳이다. 그렇다면 그 시는 김시습이 일본 승려로부터 차 대접을 받고 느낀 소감을 적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노교수는 이 시로써 김시습의 초암차가 일본으로 전래한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한다.

셋째, 일본의 초암은 김시습 이전에도 수없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기록상 일본 최초의 초암은 13세기 때 편찬된 『발심집發心集』이라는 불교 설화집이다. 그것에 의하면 겐빈玄敏이라는 승려가 초암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8~9세기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김시습보다 적어도 600여 년이나 앞선 인물이다. 그 이후 초임 생활을 한 사람들이 여러 명이 연이어 나왔고, 승려로서는 사이교西行(1118-1190)와 가모노 초메이鴨長明(1155-1216)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 모두 김시습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이다. 사이교는 요시노산吉野山에 들어가 초암을 짓고 3년이란 세월을 보냈고, 초메이는 히노日野의 산속에서 초암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김시습의 초암이 일본 초암다실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언설은 성립되기 어렵다.

특히 초메이는 자신의 초암 생활을 적은 『방장기方丈記』라는 수필집을 남기고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그의 초암은 「방장암」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좁은 공간에서도 취미, 종교, 생활의 3부분으로 나누어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그 방 넓이가 방장方丈이며, 유마거사의 방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방 크기는 정확히 사방이 1장이며,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다다미 4장 반의 넓이이다. 이것은 초암다도의 개조 무라다 쥬코村田珠光(1422-1502)의 초암다실과 같다.

일본 다도의 명문가인 야부노우치 치쿠신薮內竹心(1678-1745)이 쓴 『원류다화源流茶話』에서도 쥬코가 처음에는 다다미 6장의 방을 선호하였으나, 이후에는 유마거사의 방장에 따라 4장 반으로 정하였다고 명확히 하고 있다. 쥬코 이후 초암다실은 다다미 4장 반이 기준이 되었다. 이 기준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처럼 일본 초암다실은 김시습이 아닌 유마거사의 방장에 있다.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 초암의 다실과 다도는 불교에 기반을 두고 유마거사를 지향하는 것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마무리를 짓고 있다. 이와 같이 노교수는 기존의 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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