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향하여... 포항 이가리 닻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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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향하여... 포항 이가리 닻 전망대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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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 경북 포항 청하면 이가리

 

                   이가리 닻 전망대. 닻 모양을 형상화한 전망대로 독도수호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포항 청하면 바닷가의 이가리와 용두리는 용산 자락이 동해로 툭 내려서는 벼랑 진 지형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져 있다. 그 벼랑의 해송 숲에서부터 바다를 향해 하늘길이 뻗어 있다. ‘이가리 닻 전망대’다. 높이 10m, 길이 102m 규모로 ‘닻’을 형상화 했다. 전망대는 지난해 5월에 준공되었다. 2019년부터 추진해온 ‘영일만 해오름탐방로’ 조성사업의 일환이다. 포항시내 송도해변에서부터 영일대해수욕장, 영일만항, 칠포, 월포, 화진 해수욕장까지 총 길이 39.2km에 이르는 길이다. 전망대는 독도를 향하고 있다. 이곳에서 독도까지는 직선거리로 251km. 그렇게 이 강철의 다리를 가진 현대의 대(臺)는 삶에의 염원과 부여된 상징을 그러안고 닻을 내리고 있다. 

“외국 갈 필요 없다. 우리나라도 이래 좋은 데가 많은데.” “맞다, 맞다.” 중년의 두 남자가 목청을 높여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는 호기심과 만족의 몸짓을 드러내며 바다 위를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해송의 투명한 그늘을 뚫고 포르르 날 듯 달려온 두 소녀는 초승달 같은 눈으로 바다를 꽉 안았다. 커다랗게 부푼 볼은 마스크로도 감춰지지 않았다. 가까운 바다의 파도는 성급하고 거칠었다. 포말은 흩어지기도 전에 뒤엉켜 생크림 같기도 했고 눈이 쌓인 듯도 했다. 먼 바다는 너무나 고요했다. 하늘이 엷은 청보라 빛 베일을 드리워 바다를 잠재우는 듯했다. 걱정을 모르는 아이의 낮잠 같은 세계였고 사람들은 모두 절반의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빛났고 자유로웠다.  

 

       전망대에서 북쪽 해안선을 본다. 갯바위 지대를 지나 산자락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벼랑이 조경대다.   

이가리 닻 전망대에서 북쪽 해안을 바라본다. 용두리, 월포 해수욕장, 방어리, 조사리가 나무랄 데 없이 잔잔한 곡선으로 멀어진다. 이가리와 용두리의 경계 부근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벼랑이 단단하게 서서 먼 데를 바라본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은1587년 8월 5일 ‘엷은 안개 저녁 햇살에 비가 조금씩 내리는’ 때에 저곳에 올라 글을 남겼다. ‘누대에 올라서 바라보니 멀리 북쪽 바다에 하늘이 광활하다. 서산(西山)에 구름은 가까이에 높이 솟아 있고 기이한 바위가 빽빽이 서있어서 푸른 거울을 아주 가까이서 보는듯하다. 물에 뜬 갈매기와 나는 백로가 태연히 왕래를 한다. 작은 배 수십 척은 날이 저무니 다투어 고기를 잡고 곁에 있는 배 한척은 노래하고 소리치며 남쪽으로 간다.’ 그림 같은 글이다. 그는 저곳을 조경대(照鏡臺)라 기록했다. 바다가 거울같이 맑게 비춘다는 뜻이다. 

 

                     조경대 방향의 갯바위 지대. 바위들의 양감과 스케일이 다른 행성의 것 같다. 

인조 때인 1624년에는 부제학 유숙(柳潚)이 경주부윤 이정신(李廷臣), 청하현감 유사경(柳思璟), 송라역 찰방 변효성(邊孝誠)과 저곳에서 술을 마시며 놀았다 한다. 그러다 임씨라는 사람이 고래를 잡는 것을 보고는 조경대(釣鯨臺)라 했다. 고래를 잡는 것을 바라보는 누대다.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은 1733부터 2년간 청하현감을 지냈는데 여름이면 조경대에 올라 그림을 그렸다고 전한다. 당시 조경대에는 큰 정자도 있었고 청하지역의 초시과거를 보기도 했던 해변의 명소였다 한다. 해월이 말한 기이한 바위들은 눈 아래 제 멋대로 펼쳐진 저 갯바위들이 아닐까. 반드시 해변으로 내려가 저들 가까이로 다가가 보아야 한다. 하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양감과 스케일에 흠칫 놀라게 된다. 잠시 다른 행성에 착륙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바위 꼭대기에 자라난 소나무 덕에 지구로 돌아오게 된다. 

 

전망대에서 남쪽 해안을 본다. 이가리 해수욕장을 지나 거북바위가 있는 갯바위군, 이가리 방파제로 시선이 이어진다. 

전망대 남쪽에는 이가리 마을 방파제와 이가리 해수욕장이 보인다. 바다로부터 가까스로 기어 나와 철퍼덕 엎어진 듯한 모습이다. 마을 사람들은 양지라고 부른단다. 빛에 젖은 모래밭을 밟고 마을 방향으로 간다. 작은 곶을 이루는 바위 절벽 아래로 길이 나 있다. 절벽은 2017년 지진으로 쏟아져 내려 절경 하나를 잃었다고 한다. 최근에 정비한 길은 크고 작은 돌덩이들로 덮여 있다. 부서진 절경의 조각들일까. 바다에는 많은 갯바위가 있다. 그들 중 유난히 둥그렇게 솟은 바위가 거북바위다. ‘용왕을 만나러 바다로 들어가는 형상’이라 한다. 옛날 이가리의 어린 아이들은 저 바위에 기어 올라가 다이빙을 하곤 했단다. 생각해 보면 아찔한 일이지만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고 한다. 

 

                             이가리 방파제 인근의 갯바위들. 가운데 둥그런 바위가 거북바위다. 

이가리(二加里)는 옛날 도 씨와 김 씨 두 가문이 길을 사이에 두고 각각 집성촌을 이루어 살다 하나로 합쳐진 마을이라고도 하고, 두 기생이 갈림길에 터를 잡고 살면서 늙도록 마을을 개척했다고도 한다. 내항은 넓고 잔잔하다. 배들은 가지런히 정박되어 있고 선착장 가에는 초록색 작업장들이 줄지어 서 있다. 물량장에는 그물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이가리 해녀 쉼터’라는 간판이 달린 컨테이너는 자물쇠가 열려 있다. 빨간 등대가 있는 북 방파제 앞 3층 건물은 옛 이가초등학교다. 1943년에 개교하여 1996년에 폐교되었고 이후 이가리 해양고등학교 실습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지금은 독도체험 연수원이다. 독도강의, 독도체험, 독도사진전, 공연, 캠프파이어, 올레길 걷기 등 체험을 하는 곳이라 한다. 마을 남쪽에 있는 높은 건물은 카페와 펜션이고 그 옆에는 해양파출소가 자리한다.  

 

   이가리의 잔잔한 내항. 배들은 가지런히 정박되어 있고 선착장 가에는 초록색 작업장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가리는 청하면의 큰 마을 중 하나다. 과거 1976년에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어촌계로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미역과 전복을 양식했고 잠수 작업선도 있었단다. 논농사도 지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일렬로 서서 모내기를 하였고 소들은 해변 가에 방목되어 모래를 질근질근 밟으며 자랐다. 이제는 빈집도 더러 있고 오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가리 사람들은 매년 정월마다 김씨 터주와 도씨 골목 신위에 ‘당고사’라 불리는 동제를 지낸다. 음력 9월에는 풍어제를 올리는데 옛날 매년 올리던 것을 요즘에는 5년마다 올린다. 풍어제 때에는 타지에 나가 생활하던 이가리의 옛 주민들도 고향을 찾아와 일손을 돕고 행사에 참여한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의 굿에 대한 신앙은 강하다. ‘6.25동란 때 굿을 못해서 이곳만 폭격을 당해 희생자가 많았다’는 기억이 깊어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곰곰. 아 용왕님께 제사를 올리지 않았구나 하는. 확고한 순심(純心)으로 둘러싸인 내항의 바닷물은 먼 바다처럼 고요하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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