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시론] 즐거운 학문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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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시론] 즐거운 학문을 꿈꾸며
  • 이승종 연세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23.01.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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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시론]

 

오  친구들이여!   이런  곡조들이  아닌,
좀  더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자. 

- 베토벤 -

 

1. 유교이성비판

조선 왕조 500년을 지배했던 유교는 일본을 매개로 한 서구문명의 유입이라는 외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붕괴했다. 그러나 자체적인 지양과 극복의 과정이 없었기에 우리 안에 내재된 유교적 관성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발현되곤 한다. 조선을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유교이성비판이 우리 스스로에 의해 한 번도 수행된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유교적 관성의 유혹에 여전히 무방비상태이고 실제로 그 덫에 쉽게 걸려들곤 한다. 

유교의 성리학적 화석화는 유교의 시조인 공자에게서 이미 그 전조를 찾을 수 있다. 『논어』의 「향당」편에서 보이는 격식주의, 이(夷)의 은나라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선대의 전통을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폄하하고 주나라의 문물만을 숭상하는 이성중심주의 혹은 인간중심주의, 세상만사를 도덕의 잣대로 평가하고 이해하는 도덕주의 등은 소중화를 추구한 조선 성리학에 그대로 수혈되었다. 「향당」의 격식주의는 예송논쟁을 낳았고, 숭상의 대상은 주나라에서 명나라로 업데이트되었으며, 도덕주의는 도덕형이상학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유교 이데올로기로 단일화된 사회 체계 하에서 소격서로 대표되는 하늘과 별에 대한 제사는 폐지되고, 팔관회로 대표되는 전통적 축제 문화도 금지되었다. 중화사관과 어긋나 보이는 사서(史書)들은 모두 수거되고, 관변 이데올로기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학자나 선비들은 사화를 면치 못했다. 조선은 철두철미 유교의 나라였으며 유교는 조선 지배계층의 생활양식이었다.

조선에서 유교는 사대주의와 짝을 이루어왔다. 유교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 중국의 문물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과 동의어로 간주되다보니, 중국을 종주국으로 삼고 조선을 제후국으로 여기는 것을 당연시했다. 유교를 배우고 익히면서 조선인은 이(夷)의 정체성을 버리고 스스로 부과한 이등 중국인의 자격으로(소중화) 중국적 천하질서에 귀화되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군신관계를 넘어서는 부자관계로 이해하였다. 유교와 짝을 이룬 화이관(華夷觀)에 기초한 중화주의에 가스라이팅 되면서 조선은 자발적으로 명나라의 아바타로 화한 것이다. 실리와 힘의 논리로 이해해야 할 외교관계를 천리(天理)나 의리(義理)의 차원에서 이해하다보니, 조선은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화(華)가 아닌 이(夷)의 나라라는 점에서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선이야말로 사라진 명나라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시대착오적 환상에 빠져들었다. 단군과 고조선으로 상징되는 이(夷)의 상고사는 조선인 자신에 의해 지워지고 잊혀졌다. 이처럼 유교가 중국을 받드는 의식화 교육의 커리큘럼이었기에 유교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사대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이(夷)의 상고사를 되찾을 수도 없다. 

조선, 유교, 중국이 삼위일체를 형성해왔다는 사실은 조선의 붕괴에 즈음하여 출현한 최남선, 신채호, 정인보, 김교헌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대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의 소중화 이데올로기로 절맥될 위기에 처해 있던 단군과 고조선을 부활시키는 대륙사관을 전개하면서 ‘동양사=중국사’의 일방적 등식을 깨뜨렸다. 결국 조선이 죽어야 이러한 대안적 역사관과 세계관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유교, 중국의 삼위일체가 완전히 와해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우리는 한국의 역사와 철학을 조선과 유교에 치중해 연구하며, 조선 이전은 판타지이고 유교 이외의 사상은 외래사상이거나(불교) 급이 떨어진다는(도교) 자의식과 편견을 지니고 있다. 


2. 즐거운 동이

중국 측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전하는 우리 민족에 대한 기록은 유교적 엄숙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부여인들은]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큰 모임을 가지고 며칠 동안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그 모임을] 영고(迎鼓)라고 부른다.

[부여인들은] 길을 다닐 때에는 낮이든 밤이든 늙든 어리든 가릴 것 없이 어김없이 노래를 부르기에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부여는 고조선에서 나왔고 고구려에 병합되었지만 백제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역사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고대국가이다. 기록 속의 부여인은 하늘을 숭상하고 축제와 예술을 사랑하는 낙천적 영혼의 소유자이다. 비록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음악을 저리도 사랑한 부여인에게는 세상을 음악정신으로 이해하는 긍정적 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부여의 또 다른 갈래인 고구려에 대해서 <동이전>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은] 습속에서 먹는 것은 아끼지만 궁전을 조성하는 것은 좋아해서 사는 집 좌우로 큰 건물을 세우고 [그곳에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한편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도 제사를 지낸다.

[고구려] 백성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의 촌락마다 저녁나절만 되면 남녀가 무리를 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며 놀이를 즐긴다. […] 길을 다닐 때에는 한결 같이 빨리 걷는다. 시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온 나라에서 큰 모임을 갖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고 부른다. […] 그 나라의 풍속은 음란한 경향이 있다.

먹는 것을 아껴가면서까지 궁전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볼 때 고구려인들이 상무정신과 영성(靈性)을 겸비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부여에 비해 고구려는 귀신과 영성과 사직에도 제사를 지내는 등 샤머니즘의 풍습이 강했고 성(性)문화도 개방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걸음걸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인은 생명력이 충만한 건강한 사람들이었다. 부여인과 고구려인에 대한 중국 측 사서의 서술은 통상적으로 우리의 민족정서로 여겨져 온 한(恨)이 우리의 상고시대에는 적용될 수 없는 후대의 것임을 보여준다. 저러한 굴절된 시각을 벗어던져야만 우리의 시원 형태인 부여인과 고구려인의 세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보이는 다음 구절은 고구려인들의 높은 향학열과 심신수련의 실천을 잘 보여준다.

습속은 서적을 매우 좋아하여 문지기, 말먹이 따위의 (가장 미천한) 집에 이르기까지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른다.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이나 미천한 집안까지도 서로 힘써 배웠다. 

출세를 지향하는 조선의 선비나 한국인의 향학열에 비해 문지기, 말먹이, 가난하고 미천한 집안까지도 배우기를 좋아했다는 고구려의 향학열은 남다른 데가 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던 군사대국이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패자(霸者)의 자격을 갖춘 문화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무를 겸비한 저러한 강국에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무실역행의 진취적인 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3. Black or White

니체는 고대 그리스 문명을 아폴론적 꿈과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이중주로 풀어냈으며,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을 대지의 은닉과 세계의 환한 밝힘 사이의 대립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은 태양의 신으로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이성적 존재이고, 디오니소스는 대지의 풍요를 상징하며 술을 관장하는 신으로 열정과 광기의 표상이다. 

니체와 하이데거가 공시적 차원에서 제시한 해석의 이원적 구도를 우리는 골란(Ariel Golan)이 통시적 차원에서 제시한 파토스적 흑신과 로고스적 백신의 종교론에 견주어보고자 한다. 즉 고대 그리스 문명의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예술작품에서 대지의 은닉을 흑신에, 아폴론적 꿈과 세계의 환한 밝힘을 백신에 연관지어보고자 한다.   

고대 동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흑신과 백신의 면모를 여실히 발견한다. 대지에 터한 흑신 웅녀가 은폐된 어두운 동굴 속에서 인고의 성숙 끝에, 법과 질서의 세계인 신시(神市)의 백신 환웅과 합일하게 되는 단군사화의 내러티브는, 아폴론적 꿈과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이중주가 고대 그리스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상고사에서도 시공간의 차이를 내며 반복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유의 시원에서 피어난 샤머니즘은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 디오니소스적 축제로 만개했고, 고대 동이 사람들은 술과 노래와 춤에 도취되어 광기(혹은 끼)를 발산하며 황홀경을 체험했다. 고구려에 대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다음 기록에서 보듯이 그들은 세상을 문명의 산물인 도덕의 잣대로 재단하기 이전인 태곳적 흑신 숭배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나라의 동쪽에는 큰 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고 부른다. 시월이 되면 나라에서 큰 모임이 열리고, 수신(隧神)을 맞이하여 도읍의 동쪽으로 모시고 돌아와 제사를 지내고 나서, 나무로 만든 수신의 형상을 신의 자리에 모신다. 

수신은 단군사화 속의 웅녀를, 수혈은 웅녀가 삼칠일간 금기하던 굴을 연상케 한다.

고대 동이 사람들은 흑신의 디오니소스적 열정뿐 아니라 환웅에게서 비롯되는 백신의 아폴론적 균형을 알고 있었다. 환웅과 웅녀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는 단군왕검은 그 이름 안에 백신과 흑신의 요소를 나란히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고구려 고분벽화나 백제 금동대향로와 같은 예술의 걸작들은 저 두 신격의 창의적 승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수놓고 있는 해와 달의 신이 곧 백신과 흑신이며 그 외의 여러 신들과 동물들과 문양들도 저 두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니체가 목도한 염세주의는 동이의 예술세계나 동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묘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고대 동이 사람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가무배송도에 표현되어 있듯이 망자의 마지막 길도 춤으로 배웅했던 신명 넘치는 사람들이었고, 망자의 집인 고분의 벽에 그가 체험한 지상에서의 일과 그가 앞으로 가게 될 천상의 풍경을 동등하게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은닉의 공간인 대지를 환한 밝힘의 공간인 세계로 재창조한 멋진 예술가들이었다.

고대 동이 사람들은 유교가 괴력난신으로 폄하했던 샤머니즘을 믿었고, 불교가 일체개고(一切皆苦)로 폄하했던 삶을 긍정했으며, 도교가 탐닉했던 개인주의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들이 추구한 철학은 샤머니즘에 입각한 즐거운 학문이었다. 그들은 신들을 믿었고 신 내림을 믿었고 하늘나라를 믿었고 영혼불멸을 믿었고 윤회를 믿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믿지 않는 우리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 대가로 우리는 허무주의자가 되어 활력을 잃은 반면 그들은 하루도 노래와 춤을 거를 수 없으리만치 생명력과 기상이 넘쳐흘렀다. 그들의 애니미즘은 바로 이 생명의 느낌에 터한 믿음이었다. 

고대 동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천지신명에 의해 보살핌 받고 있다고 믿었고 이를 사신도와 사수도로 표현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믿지 않는 우리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 대가로 우리는 모두 창 없는 단자로 고립된 반면, 그들은 자신들을 보살펴주는 모든 신적인 것들과 제사와 축제를 통해 교감하였다.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자이지만 중심인 인간은 자기 자신뿐인 반면, 그들은 신과 인간을 아우르는 통합적 세계관을 지향하였기에 신들은 그들과 늘 함께 하였다. 대부분의 우리는 물신(物神)만을 숭배하는 반면, 그들은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먹는 것을 아껴가면서까지 신들에 제사지냈던 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온갖 신들이 공존하는 경이로운 별천지로 이해했던 반면, 인생 뭐 있느냐고 자조하는 우리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이 되어버렸다. 


4. Ebony and Ivory

흑신과 백신의 전통이 조화를 이루어오던 동이의 역사는 조선에 와서 일대 전환을 맞게 된다. 동이의 흑신 전통을 지워내고 중국의 유교라는 단일한 체제로 조선을 리셋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 고유의 즐거운 학문도 절맥되다시피 했다. 유교가 지향하던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는 서양의 근대성으로 옷을 갈아입은 상태로 여전히 우리 시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탈근대성의 대두에 편승해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유행을 타지만 그 전신인 유교의 도덕주의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탈근대성의 선구인 니체가 창조한 위버멘쉬는 그의 지향점이 선악의 저편에 선 탈인간중심주의임을 가리키고 있다. 니체의 탈인간중심주의가 세속적 집단성에 빠진 익명적 개인을 초월해 자기 운명을 깨닫는 본래성의 신격인 디오니소스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현대의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지양할 수 있는 원천으로 우리는 동이의 흑신 전통과 즐거운 학문을 호출하고자 한다. 

이성을 지녔다지만 우리는 여전히 동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한 것이다. 단군왕검이 그러하듯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표현에도 백신과 흑신의 요소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사람에게서 흑신적 동물성은 절대로 소멸될 수 없다. 사람의 동물성은 지워내야 할 암흑물질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다. 니체의 철학은 그것을 부정하는 모든 형태의 이성중심주의가 오히려 생명이 고갈된 허무주의로 화함을 폭로하고 있다.  

철학자는 문명을 진단하고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하는 선지자이다. 샤먼의 시대에는 샤먼이 그 역할을 담당했고 제정일치 시대에는 샤먼왕인 단군이 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태곳적 흑신과 백신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흑신과 백신을 현재로 호출해 복원하자면 그 색에도 시대에 맞는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아울러 흑신과 백신을 이것 아니면 저것의 흑백논리로 이해해 조선의 유교처럼 사람의 동물성을 거세하고 만민을 도덕군자로 교화하거나, 현대의 자본주의와 같이 일차원적 경제동물로 평준화하는 일방적 문화기획도 지양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Black or White가 아니라 Ebony and Ivory를 지향한다. 두 요소를 어떻게 배합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祕傳)의 연금술은 없다. 사안의 개별성을 무시한 선험적 탑다운(top down)이 아니라 사안에 따른 경험적 바텀압(buttom up)의 유연성이 요청된다.

우리에게는 지금도 수천 년 전 환웅과 웅녀의 이질적 전통을 한데 아울러 고조선이라는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낸 단군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의 후예들이 펼쳤을 즐거운 학문을 원시반본(原始返本)하여, 이성이 동맥경화를 앓고 있는 불임의 시대를 타개할 새로운 빛 내림으로 재구성해내야 한다. 그 빛은 온 세상을 구석구석 밝히는 광명이라기보다 하이데거가 표현했듯이 어두움과 밝음이 만나는 접점에서 피어나는 서광과 같은 것이다. 즉, 그 빛은 어두움(흑신)을 간직한 채 밝히는 비은폐(aletheia)로서의 진리 사건을 상징한다. 시대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유하고자 그 빛 내림을 받는 샤먼의 소명을 철학자가 다시 본래적으로 떠맡을 때, 즐거운 학문은 비로소 그에 의해 복원되고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흑신과 백신의 전통을 교직한 즐거운 학문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생명이 고갈된 내용 없는 사유에 빠져있는 현대의 공허한 학문을 극복하고, 개념 없는 직관이나 매스 미디어의 프로퍼갠더에 자신을 내맡긴 맹목적 대중의 실종된 정신을 회복하여 새로운 문명의 서광으로 다가올 미래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이승종 연세대 철학과 교수

연세대 철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뉴욕 주립대(버팔로)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캘리포니아 어바인대 철학과 풀브라이트 방문교수와 카니시우스대 철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며, 같은 대학의 언더우드 국제대 비교문학과 문화 트랙에서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논리철학적 탐구』,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분석적 해석학을 향하여』,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시공을 관통하는 철학자들의 대화』, 『우리와의 철학적 대화』, 『우리 역사의 철학적 쟁점』,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자연주의적 해석』, 뉴턴 가버(Newton Garver) 교수와 같이 쓴 Derrida and Wittgenstein(Temple University Press, 1994)과 이를 우리말로 옮긴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이 있으며, 연구번역서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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