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를 생각하지 말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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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를 생각하지 말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2.12.24 2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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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에세이]

 

어제를 생각하지 말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오늘에 충실하라. 석가모니 말씀 중에 가장 와닿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제의 지나간 잘못에 대한 회한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지금의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장차 다가올 일에 대비도 하지 말란 말은 아니다.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여 정작 중요한 지금 여기서의 삶을 등한시 하지 말라는 깨우침이다. 어느 나이든 명사가 살아오면서 지금껏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걱정 좀 덜 하고 살았더라면...” 하고 대답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실제로 사람들은 소용없는 걱정에 싸여 일생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일이 잔금 날인데 돈이 안 들어오면 어떡하지? 배가 자꾸 아픈데 혹시 암에 걸린 건 아닐까? 이번에도 대학 입시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혹시 사촌이 땅을 사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걱정들 중 정말로 쓸 데 있는 걱정은 4%라든가? 하는 것을 또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주워듣는 게 아니라 주워 읽는 게 많은 나인가 보다.

석가모니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묻는 제자인지 신도에게 “모른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헛된 노력을 하지 말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사람이 독화살에 맞았는데 그것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또 묻은 독의 종류가 무엇이지를 따질 겨를이 있느냐, 독부터 제거해야지.” 하였다. 참으로 현실적인 이승의 가르침이다.

석가모니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괴로운데, 그 괴로움의 근원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세 가지라고 하였다(고 후세 사람들이 전한다). 즉 ‘탐, 진, 치’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진다. 뭔고 하니, 이 세 가지가 같은 차원에서 분류되거나 열거될 성질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탐욕은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것이고, 분노는 성을 내는 것이다. 둘 다 어떤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이다. 그 반면 어리석음은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마음 또는 더 정확하게는 두뇌의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앞의 둘과는 차원이 다른 요소이다. 불교의 역사가 2500년인데 이 사실을 지적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 놀랍다.

ⓒUnma Desai

나는 어리석음의 자리에 ‘걱정’을 놓았으면 한다. 걱정은 탐욕, 분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 괴로움의 원인으로 탐욕이나 분노보다 걱정이 오히려 더 보편적이지 않을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 괴로움의 세 가지 근원은 ‘탐, 진, 우’가 된다. 욕심이 많고 성이 잘 나고 걱정이 많은 것이 인생이 괴로운 가장 중요한 원인들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어리석음(‘치’)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에 대해 인간이 어리석기 때문에 탐, 진, 우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누군가 걱정 역시 인간의 탐욕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론을 펼지 모르겠다. 아니다. 걱정은 욕심 때문에 생길 수도 있지만 다른 경우도 흔하다. 대개는 미래나    다가올 상황의 불확실성 때문에 걱정이 생긴다.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은 물론 삶에 대한 애착심이 없으면 생기지 않겠지만, 그 애착은 탐욕이 아니라 정상적인 본능이다. 욕심은 욕심이되 필요한 욕심일 뿐 탐욕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을 잘 받들고자 하는 욕심이 탐욕이 아니라 필요한 욕심인 것과 마찬가지다. 

실상 인간이 종교에 매달리는 것은 삶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때문이다. 그 두려움과 걱정을 덜기 위해 절대자의 존재를 찾게 되고 그래서 종교가 생겼다. 초기 불교에는 이런 점에서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바로 두려움과 걱정을 위무하는 기능이다. 마음을 비워라, 욕심 부리지 말라고만 가르치면 당장 의지할 곳을 찾아 헤매는 민초들에게 흡인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불교 광신도가 별로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에서도 절대자 비슷한 것을 내세워 무슨 보살, 무슨 보살 해 가면서 절하고 기도하고, 떡두꺼비 낳아 주십사 빌게 되었다. 대승불교에 오면서 불교도 다른 종교들 비슷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나 이슬람교 등 절대자에 절대 의존하는 여타 종교들과는 달리 불교는 여전히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냄새가 강하다. 원래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매우 합리적이고 세속적이었던 까닭이다. 그만큼 민초에 대한 강력한 흡인력은 약한 반면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해악이 비교적 적기도 하다. 

쓰고 보니 불교 평론 비슷한 것이 되었는데, ‘마음을 비워라, 세상사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 인생의 '걱정'을 많이 덜어주는 것도 사실이다. 2500년 동안의 불교 신자들과 불교학자들이야 어떻게 생각했든 나는 여전히 인생고의 근원을 '탐 진 치'가 아니라 '탐 진 우'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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