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눈으로 역사를 기록하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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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눈으로 역사를 기록하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12.21 0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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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권력: 매혹하고 행동하고 저항하는 동물의 힘 | 남종영 지음 | 북트리거 | 396쪽

 

그동안 동물은 인간 중심의 역사에서 잊힌 존재였다. 동물은 자연환경의 구성 요소에 불과하다고 여겨졌으며, 동물의 삶 또한 인간에 의해 빚어지는 수동적 결과물로 표시됐다. 동물권 논쟁이 점화할 때도 동물은 고통스러운 삶의 피해자로만 소환될 뿐이었다. 동물의 역사는 그게 전부일까? 사자의 눈으로, 고래의 시선으로, 침팬지의 마음으로 역사를 기록하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이 책은 ‘동물이 인간 지배의 결과물’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동물의 삶을 지구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인간 대 동물이라는 이분법 구도 안에서 포착되지 않았던 동물의 능동성에 주목해 인간-동물의 역사를 다시 쓴다. 

동물은 우리에게 유무형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겉으로는 인간이 동물을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인간과 협력하고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기도 하며, 종국에는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로 참여하고 있다. 시시때때로 인간의 정치에 저항하며 세계를 위협하는 비인간 행위자의 면면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 책은 가축화에 대한 전복적인 시선에서 출발해, 동물이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하며 지구의 역사를 써 내려온 모습을 촘촘히 복원한다(1부). 100여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에덴 앞바다에서 이뤄진 ‘인간-범고래 공동 사냥’,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는 브라질 라구나 마을의 ‘인간-돌고래 공동 어업’ 등의 사례가 그렇게 이 책에 불려 나온다. 인간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빠진 ‘동물’이라는 퍼즐을 하나씩 끼워 맞추는 이 작업이 향하는 목표는 분명하다. 동물들의 누락된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만이 문명을 일구고 문화를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관점이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도그마임을 일깨우며, 복잡한 그물로 얽혀 있는 생명의 역사를 복기해 나간다.

2부에서는 근대 이후 인간-동물의 관계를 다룬다. 인간이 동물을 상품화해 정치의 최하위 계급으로 복속시킨 이 시기의 적나라한 초상을 인간과 동물 간에 이뤄지는 지배·협상·저항의 틀, 이른바 ‘동물정치’의 관점에서 읽어 낸다.

산업화 이후 인간이 동물을 통치한 논리와 방식은 무엇일까? 인간의 지배는 동물의 삶과 죽음, 생활양식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이 같은 문제의식과 함께 소환된 동물의 삶은 그 자체가 자본주의경제의 축소판이다. 물자와 사람을 이동시키느라 산업 역군으로 혹사당한 역용마, 최초로 컨베이어시스템이 도입된 대규모 정육 단지 ‘유니언 스톡 야드’와 그 안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 긴뿔소, 공장식 축산의 핵심을 이루는 밀집형 가축 사육 시설(CAFO, Concentrated Animal Feeding Operation)에서 대량생산 되는 소와 닭과 돼지의 실상 등을 밝히며, 저자는 지금껏 주목받지 못한 동물을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되살려 낸다.

인간의 일방적인 지배에 저항해 태업하고 파업하는 ‘노동자’ 동물의 정체성 또한 중요하게 다룬다. 이 책은 동물을 ‘의식 없는 기계’로 단정한 기존의 역사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미시적 정치학을 애써 무시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동물은 기계와 달리 ‘살아 있음’과 ‘행동 가능성’을 무기로 인간에 맞서 저항해 왔기 때문에 동물에 대한 전일적 지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고용주 인간’과 ‘노동자 동물’의 대립 구도가 선명히 드러난다. “노동자가 파업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기에 권력을 갖듯, 노동하는 동물도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기에 권력이 있다.” 이렇게 지배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동물의 고통스러운 얼굴과 몸짓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이들이 대리인으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동물정치 또한 시작된다.

3부에는 동물 지배 체제 속에서 떠오른 동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흔히 동물의 희생과 헌신은 세간에 미담으로 회자되지만, 동물 영웅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영웅’일 뿐이다. 사람을 살린 영웅으로 추앙받은 고릴라 빈티 주아, 총알을 맞고도 40킬로미터를 난 비둘기 전사 셰르 아미 등 몇몇 동물 영웅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져 보면 대답은 자명하다. “이들은 영웅이 되고 싶어 했을까?” ‘동물 영웅’ 담론에는 인간-동물 관계의 모순이 숨어 있으며, 그 모순 속에서 동물의 행동을 인간의 기준으로 재단했을 때의 위험성이 드러난다.

인간 중심적인 시선을 거둔 이 책의 방향키는 다른 곳으로 향한다. 범고래 틸리쿰, 그리고 사자 세실의 삶이다. 수족관에 감금된 동물, 보호구역에 사는 야생동물을 각각 대표하는 틸리쿰과 세실은 이 시대 야생동물 착취 체제의 두 경로를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일련의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틸리쿰은 수족관에 끌려가 세 건의 인명 사고에 연루됐으나 범고래쇼의 비윤리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돌고래 해방운동의 견인차가 되었으며, 세실은 사람에게 살해되었으나 그 죽음을 통해 선진국의 기만적인 환경주의를 폭로했다. 저자는 인간 중심의 역사에 새로운 갈림길을 제시한 두 동물의 생애를 전기적(傳記的) 서사로 재구성함으로써, 이들의 고유한 삶을 집단적 종의 ‘생태’로 일반화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4부와 5부에는 동물에게 덧씌워진 인간의 편견을 깨부수고 동물의 진짜 모습에 다가가고자 하는 학계와 사회운동 진영의 이야기를 담았다. 과학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동물의 새로운 면을 보여 주었지만, 시행착오도 많았다. 특히 1960~1970년대 교차 양육과 수화 교육 실험에 동원된 ‘말하는 유인원’들의 아픔은 과학적 이상주의에 내재된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삶 자체를 실험으로 전락시켰던 과학의 자기 확신은 침팬지, 고릴라, 보노보, 오랑우탄 수십 마리를 반인반수의 괴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야생에서, 때로는 실험실에서 쌓아 간 과학자들의 지식은 어두운 심연에 있던 동물에 대한 앎을 조금씩 확장했다. 고래, 유인원 무리 속에서 이뤄진 현장 연구는 죽은 이에 대한 애도와 추모가 인간만의 전유물이라는 통념을 깼으며, ‘세기의 실험’으로 꼽히는 침팬지 거울 실험은 동물이 인간의 자의식과 비슷한 정신 작용을 한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는 비인간인격체(nonhuman person) 담론으로 이어지면서 동물권 운동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뛰어넘은 인간-동물 관계를 전망해 보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인간과 동물이 평등하게 관계 맺기 위해서는 기존의 동물권 운동 또한 돌아봐야 한다. 동물복지의 향상이 20세기 동물권 운동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물을 단순히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가둬 버린 것은 근대적 동물정치의 한계다. 저자는 ‘주폴리스(zoopolis)’, 즉 인간과 동물이 모두 속한 ‘동물정치 공동체’ 개념을 경유해 인간-동물 관계의 회복을 논하는 동시에, 도나 해러웨이의 ‘관계적 윤리’가 필요한 이유 또한 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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