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인들이 영원히 남기고자 했던 돌에 새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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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인들이 영원히 남기고자 했던 돌에 새긴 기록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2.21 0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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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각의 사회사: 고대 중국인의 욕망과 그 기록 | 홍승현 지음 | 혜안 | 560쪽

 

이 책은 고대 중국인들이 돌[石]에 새겨 영구히 기억하고자 했던 욕망에 대한 보고서다. 시대와 계층을 달리하여 다양한 욕망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중국인들은 공통적으로 그것이 ‘영원히’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를 위해 ‘돌’이라는 매체를 이용하였다. 누구는 이름을 남기기를 원하였고 혹자는 가문의 탁월함을 기억시키고자 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은 정치·사회적 영달보다는 죽어서도 한 조각의 땅을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하기를 원하였다. 왕조라고 다르지 않았다. 왕조 혹은 권력의 위대함과 영원함을 돌에 새겨 기억시키고자 하였다. 책에서는 이를 묘비(墓碑), 묘지(墓誌), 매지권(買地券), 왕조의 기념비를 통해 탐구한다.

중국에서 최초로 돌을 이용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은 진시황이다. 그는 전국 순행로에 7개의 석각을 세워 자신의 공업을 기록하였다. 진시황은 자신이 이룬 미증유의 업적이 신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의 능력과 자신을 보우하는 조상들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선언하며,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거부하였다. 신이 사라지자 인간은 신을 예찬하는 대신 스스로의 공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선조를 칭양함과 동시에 자신의 명성을 보장해 주어야 했고 후세에까지 드러나야만 하였다. 새로운 도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도구로 내구성을 완비하여 불변을 상징하는 돌이 선택되었다. 영원한 기억을 위한 도구로서 돌보다 마침한 것은 없을 터였다.

물론 이 책이 죽은 자의 욕망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산 자들의 욕망이 돌을 통해 구현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죽은 자의 공적을 기록한 묘비나 묘지가 오히려 산 자를 위한 석각이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입비자들은 죽은 자를 추모하기 위해 비용을 갹출하여 비를 세우며 사사로이 시호를 바쳤고 그 대가로 명성을 얻었다. 입비 행위가 철저히 정치적 행위임을 간파한 이는 조조(曹操)였다. 205년 조조가 선포한 금비령(禁碑令)은 후장(厚葬) 금지의 일환으로 이해되었지만, 그것이 원소(袁紹)의 아들 원담(袁譚)의 장례식을 앞두고 내려졌다는 것은 입비가 단순히 후장의 폐해로만 인식된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조조에 의해 시행된 입비 금지는 사대부들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금지라는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황제의 권력 밖 재야에서의 명성 획득을 목표로 하는 사대부들의 집단적 행위에 대한 금지며, 황제의 조령(詔令)을 무력화하는 사대부들의 자율적 규범에 대한 제재이다.

이렇게 묘비를 세우지 못했던 금비령 하에서는 묘지를 만들어 죽은 자의 행적과 가계 및 가족관계를 기록하며 가문의 능력을 과시하였다. 전란과 역병이 만연하면서 죽은 자를 위해 무덤을 구매한 증명서인 매지권에는 차츰 산 자들이 죽은 자의 해코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주술의 구절들이 기록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죽은 자들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산 자들의 욕망은 또렷해졌다. 죽은 자들을 위한 석각은 그렇게 차츰 산 자들을 위한 기록으로 변화해 갔다.

왕조의 기념물은 흔히 왕조의 위대함을 노래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시각을 달리하여 위기 속에서 건립된 기념비를 통해 ‘석각의 정치학’이라는 특별한 현상을 탐구하였다. 진정한 정치술이란 위기 속에서 빛나는 법. 이를 위해 왕조 말, 혹은 어린 황제의 즉위, 무능한 황태자의 즉위 직전에 건립된 석각들을 분석하였다. 위기 속에서 불멸을 상징하는 ‘돌’이 선택되게 된 과정을 통해 돌이 얼마나 사회적 필요와 정치적 의도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석각이 어떤 시대적·사회적 결과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고대 중국인들은 지하에 묘기(墓記)를 설치하면서 한편으로 묘지를 제작하여 무덤에 매납하였고, 지상에 묘비를 건립하면서도 석궐(石闕) 또한 세웠다. 주술성 가득한 토지 계약서인 매지권이 유행할 때 죽은 자의 혼을 진혼하는 진묘문(鎭墓文)도 유행하였지만 결코 한 무덤에서 함께 나오지는 않았다. 이것은 긴 시간 중국 고대인들이 석각을 시대에 따라, 목적에 따라, 계층에 따라 분별해서 사용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선택을 통해 그들의 내밀한 정치·사회·문화적 욕망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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