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초의 인플레이션, 그 이면에는 일본의 화폐 침략이 있었다
상태바
한반도 최초의 인플레이션, 그 이면에는 일본의 화폐 침략이 있었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2.21 0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 쌀·금·돈의 붕괴 | 김석원 지음 | 한길사 | 300쪽

 

이 책은 일본의 전략적인 화폐침략이 불러온 한반도 최초의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조선을 무너뜨리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조선의 화폐경제 미시사다. 제국주의가 휩쓴 세계사의 영향 아래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좀더 미시적인 경제 분야에 집중해 파고들며 1945년 조선이 해방과 동시에 “철저하게 무너진 폐허 위”에 남게 된 과정을 샅샅이 살핀다.

국내 총생산 가운데 화폐의 양은 고작 3%에 불과했던 조선에서 화폐의 역할을 했던 것은 쌀과 면포였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조선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마땅한 수출품이 없었던 조선에서 이 화폐 대체품들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밀무역과 강제 개항으로 이루어진 이 과정에서 오히려 조선 경제에서 화폐의 역할은 커지기에 이른다. 이후 침략기와 강점기를 거치며 조선에서의 쌀 생산은 일본의 배만 불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압박 속에 수탈당하고 있던 조선이 반격을 꾀할 기회가 있었으니, 바로 금광이었다. 평안북도 운산에 위치한 금광 지대는 동양 최대의 수익성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쌀은 자국민이 먹고살기 위해 전국적으로 유통된다는 특징이 있어 통제하기 쉽지 않은 데 비해, 금은 수요의 목적이 아닐뿐더러 금광지대가 고정되어 있기에 개항 초기 조선 조정이 적극적이었다면 주요 금광에 대한 소유권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역량도 의지도 없었던 조선 정부는 금광 개발을 개인에게 떠넘겨버렸고, 일본인들은 소유권이 명문화되는 것을 피해 지방 관리나 유력자 등을 내세워 본격적으로 금을 거래하게 된다.

21세기 지금도 여전히 한 국가의 금 보유량은 경제 안정성을 의미하고, 경제가 불안할 땐 금값이 오른다. 만일 조선이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금을 사수했더라면, 세계 시장에서 안정적인 화폐를 만들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정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조선 조정의 선택은 주조 차익을 얻기 위한 액면가만 높은 화폐의 발행이었고 이 선택은 조선 경제 붕괴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간 조선이 금속화폐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조선 땅에 화폐로 쓸 만한 금속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화폐용 금속인 은과 구리를 수입해야만 겨우 쓸 수 있는 실정에 새로운 화폐를 만든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조선에 상당량 매장되어 있던 금은 주도권을 잃어 확보할 수 없었고, 만만한 금속은 구리였다. 그러나 주요 구리 수입원이 일본이었으며, 주조 기술이나 기술자 또한 일본에서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 상인과 국가가 나선 조직적인 위조와 투기로 화폐 가치는 나날이 하락했다. 갖고 있는 돈이 금속 조각에 불과하다는데 어느 누가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조선 사람들의 이 심리를 이용해 일본인들은 또 한번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 백동화를 가져오는 이에게 자신들이 발행한 은행권을 교환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심을 바라서는 안 될 일, “같은 동전이라도 조선인이 바꾸려 하면 1전인데, 나중에 일본인이 가져가면 ‘고객우대’ 한다며 2전 5리로 쳐주는 일”도 서슴없이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개항 전후의 위조-환투기-일본 화폐 도입이라는 화폐침략의 충격이 계속된 결과, 조선에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조선 경제는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조선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모든 면에서의 침략을 받게 된다. 이후 일본이 항복하며 종결된 양차 세계대전 속에서 패전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에 무언가 남아 있을 리는 만무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민주화운동을 거쳐 다다른 2022년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시작엔 개항이 있었다. 민족의 역사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물리적 지반을 공유했던 150년 전 이 땅의 사람들이 살아남으려 애썼던 방식을 살펴보는 일이 지금 같은 땅을 밟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의미함은 당연해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