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정체성: 인문학을 위한 변론
상태바
기억과 정체성: 인문학을 위한 변론
  • 김태환 서울대학교·독문학
  • 승인 2022.12.20 00: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카데미쿠스]

오늘날 대학에서 인문학은 참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도처에서 인문학 분야 학과의 폐지 소식이 들려온다. 사회적인 수요가 없어서 좋은 취업의 전망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학문을 왜 대학에서 전공으로 설치하여 교육해야 한단 말인가?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은 도대체 왜 학생들에게 필요하지도 않고 그들이 원하지도 않는 교육을 제공하는 데 자원을 낭비해야 하는가? 불필요한 전공이 설치된 탓에 더 쓸모 있고 더 절실한 사회적 수요가 있는 공부를 할 기회를 잃는 학생이 있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오늘날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이런 우호적이지 않은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인문학을 향한 의구심의 배후에 깔려 있는 것은 학생들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사회적 수요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 내지 체념적인 순응이다. 사회적 수요는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는 조건이고, 대학은 그 조건에 맞추어 변화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사회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인재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다. 대학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 할 책임도 있지만 그 사회적 요구가 정당한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사회를 향해 정당한 요구를 제기할 의무도 있다. 오늘날 이 후자의 측면은 지나치게 간과되고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 인문학자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이 큰 호소력을 갖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자리를 빌려 인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펼쳐보고자 한다. 이야기는 우선 기억의 문제에서 시작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자기 삶의 역사 전체에 대해 기억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형성한다는 점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근본적으로 구별해주는 가장 중요한 특성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우리는 유년의 초기에 대한 기억을 갖지 못하는데, 그것은 유아의 의식 속에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기억이 축적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아는 물론 일정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기에 세상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고 언어를 습득하며 다양한 삶의 기술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유아가 가지는 지성은 현실에 직면하여 자신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일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적합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지성, 즉 실천적 지성이다. 반면에 이미 과거가 된 일을 기억하고 역사(이야기)로 구성하여 자기 삶의 의미로 만드는 서사적 지성은 한참 뒤에야 작동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지성을 이렇게 실천적 지성과 서사적 지성으로 구분할 때, 전자는 인간이 상당 부분 동물과 공유하는 지적 능력인 데 반해, 서사적 지성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보인다. 서사적 지성이 없다면 자아 정체성은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동물적 실천의 단계에서 인간적 서사 구성의 단계로 이행한다. 인간은 이 두 번째 단계에서 비로소 실천적 지성과 서사적 지성을 겸비하게 된다. 이때부터 인간은 가장 직접적인 생물학적 요구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의 역사와 거기서 구축된 고유한 정체성에 입각하여 고차원적 가치와 목표를 마음속에 품을 수 있게 된다. 꿈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와 유사한 성장의 과정은 개인의 생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도 나타난다. 인류의 역사는 크게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로 구분된다. 그것은 기억이 없는 시대와 기억이 있는 시대 사이의 구분이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을 인류의 유년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넘어오는 경계선 부근에서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르고, 점차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선사 시대에는 인간 삶의 기억을 초개인적으로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들은 시간과 함께 서서히 망각되었다. 역사 시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과거의 일들에 대한 기억을 비교적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저장하고 이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무사히 전승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제 인간의 서사적 지성과 그 능력의 산물인 기억은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인간 공동체는 그때그때 주어진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며 존속하는 단계를 넘어서 그 공동체 자체가 형성되고 생존하며 발전해온 역사 전체를 알고 이로써 그 고유한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기억은 집단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모두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이면서 한 사회, 한 공동체,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개인적 기억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와 국가,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역사에 대한 기억까지도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물론 한 사회의 정체성 역시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의식을 매개로 해서만 형성된다. 즉,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의식 속에서 일정한 사회적 기억이 공유되고 전승되어 그들이 자신의 공동체에 대해 공통의 인식과 믿음을 갖는다면 이를 사회적 정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사회적 기억은 과거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만들고, 결국 한 사회가 어떤 가치와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결정한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사회적 기억이 심각하게 왜곡되면 사회 전체가 광적인 이데올로기나 비현실적인 목표를 향해 몰려갈 위험이 있다. 

대학 제도 속에서 인문학의 정의와 경계는 상당히 모호하고 자의적인 관습에 따라 결정되는 면이 있지만, 나는 사회적 기억을 보존하고 확장하며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모든 학문적, 지적 활동을 인문학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문학은 서사적 지성의 영역이며, 그 가장 핵심적인 기능은 바로 사회적 기억의 형성과 보존을 통해 한 사회와 그 구성원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해주는 데 있다.

특히 건강하고 균형 있는 사회적 기억과 정체성 형성에서 인문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인문학적 교육은 인간과 인간 사회가 걸어온 길에 대한 기억을 가장 포괄적인 자료와 이론을 통해 일반에게 전승할 뿐만 아니라 제한적이거나 왜곡된 정보와 지식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편협한 주장에 휩쓸리지 않는 정신적 저항력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자주적으로 균형 있게 판단할 수 있는 개인들이 사회적 기억과 사회적 정체성의 형성을 주도할 때, 그 사회 전체도 무모하거나 근시안적인 목표 설정에 휘둘리지 않고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미래의 행로를 개척해갈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인문학이 사회적 기억 형성과 보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 형성에서 중요한 교육적 의미를 지닌다면,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철학을 전공해도 취업할 데가 없다. 그러므로 철학은 사회적 수요가 없다’라는 식의 주장은 오직 개인 차원의 경제적 이해관계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수요를 이해하기 때문에 나오는 논리일 뿐이다.

우리 사회와 대학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인문학을 필요로 한다. 지금의 우리가 있게 만든 인류의 역사, 사상사와 예술사, 사회사와 과학기술의 역사에 대한 소양을 갖추고 현실의 문제에 직면하여 비판적 정신으로 자신의 장래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미래에 대해 의사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개인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의 인문학은 중요한 교육적 과업을 떠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 높은 수준에서 그런 교육을 담당하고 그 기반이 되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인문학적 학문 분야의 전문 인력을 재생산하는 기지로서 기능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명확한 직업적 전망을 제공하는 학문 분과와 정체성 형성 혹은 서사적 지성과 같은 일반적인 능력과 자질을 교육하는 학문 분과를 모두 전공과 학과라는 범주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기존 대학 모델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대학의 시스템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비인기 학과를 구조조정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어떻게 이 사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인문적 가치를 현재의 조건 속에서 증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김태환 서울대학교·독문학

서울대학교 사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독문학과에서 카프카와 소설이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대학교에서 그레마스 기호학에 관한 연구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우화의 철학』(2022), 『실제 저자와 가상 저자』(2020), 『우화의 서사학』(2016), 『미로의 구조』(2008), 『문학의 질서』(2007), 『푸른 장미를 찾아서』(2001)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한병철의 『피로사회』(2012) 페터 V. 지마의 『모던/포스트모던』(2010)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