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비의 법적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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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비의 법적 지위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2.12.1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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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가엾구나 종들아!

 

북산(北山)에서 울려 퍼지는 쩡쩡 나무찍는 소리        丁丁伐木北山中

헤어진 베옷 매서운 추위에 삭풍(朔風)이 스며드네     短褐嚴寒犯朔風

가엾구나 종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끄러워 하노니      咄咄諸奴吾愧汝

그 고생이 모두 이 주인 늙은이 때문인 것을              艱辛全爲主人翁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낸 홍성민(洪聖民: 1536~1594)의 이 시는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며 땔감 마련을 위해 고생하는 노비들의 처지, 그리고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주인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홍성민의 시문집, 졸옹집(拙翁集). 규장각 소장

잘 알려진 것처럼 노비는 조선왕조에서 최하층 신분에 속한 자들로서 양반사회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이들은 주인을 위한 노역은 물론 각종 차별까지도 감수해야 했는데, 여러 연구에 따르면 조선전기에 적어도 전 인구의 4분의 1, 많게 잡으면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것으로 본다. 그만큼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조선시대 노비를 서양과 비교해서 노예로 볼 것인가 농노로 볼 것인가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이 문제는 학계에서 논쟁이 진행 중이다.

사실 노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점은 법률 속 노비의 모습이다. 특히 당시 형률에서 노비와 주인 간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었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형률 속 열악한 노비의 처지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담은 당시 형률에는 노비가 어떤 차별적 대우를 받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먼저 『경국대전』에 따르면 노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인의 잘못을 관에 고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어기고 주인을 고소한 경우 해당 노비는 『대명률』 규정보다 무거운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즉 조선왕조에서는 원천적으로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길이 차단되어 있어서 억울한 일을 겪더라도 호소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다.

이렇다 보니 주인에 대한 노비의 범죄 행위 또한 매우 엄한 형벌에 처했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대명률』에는 주인을 폭행한 노비는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신체적 공격이 아니라 단지 주인에게 폭언이나 모욕을 한 경우에도 교수형으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노비가 주인에게 욕설을 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1518년(중종 13) 9월에 의금부에서 주인에게 욕을 하며 대들었다는 이유로 경상도 의성에 사는 사노 김이동(金伊同), 검동(檢同), 물금(勿金) 등을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은 일이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되어 있다.

 

김홍도가 그린 시주하는 장면. 왼쪽 두 명의 승려가 목탁과 타악기를 두들기며 시주를 호소하고 있고, 오른쪽에 장옷을 머리에 얹은 여인이 엽전을 꺼내려는 장면이다. 맨 아래쪽에는 여인의 몸종인 비(婢)이다. 오른손에 부채를, 왼손에는 장죽을 들고 머리에는 함지박을 인 채 주인을 모시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풍속도첩』 수록.

반대로 주인의 범죄 행위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죽이지만 않는다면 노비에 대해 본 주인이 가하는 제재, 사적인 체벌은 매우 폭넓게 허용되었다. 그럼 노비를 죽인 경우에는? 『대명률』에는 노비를 살해한 주인에 대한 형량을 제시하고 있는데, 죄가 있는 노비를 죽인 경우 형벌이 장형 100대에 그쳤으며 아무 죄도 없는 노비를 죽인 경우에도 그 주인은 장형 60대에 도형 1년이 전부였다. 한마디로 말해 양반들이 가법(家法)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 종에게 사형(私刑)을 가할 수 있었고, 설령 이로 인해 노비가 죽더라도 다른 살인범과 달리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고 풀려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 양반들이 자기 노비에게 가한 체벌 사례를 찾아보자. 연세대 심희기 교수가 분석한 16세기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 기사에 따르면 노비에 대한 이문건의 체벌은 다반사였다. 그는 편지를 늦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노(奴)에게 회초리 30대를 때렸다. 또한 일기에는 지시사항을 신속히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노에게도 회초리를 들었으며, 심지어 더운 물을 속히 대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종을 구타했다고도 적고 있다. ‘좋은 말로 질책하는 것보다 때때로 체벌하는 것이 더 효과적.’ 이문건의 가내 노비에 대한 체벌 기조를 심 교수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처(妻)의 상전은 나의 상전이나 마찬가지이다?

앞서 형률에 담긴 당대 지배층의 노비에 대한 차별 관념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위에서 주인을 고소한 노비에게 한 것처럼 『대명률』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비의 범죄 행위에 대한 형량을 훨씬 강화시키는 입법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만큼 조선의 노비법이 중국보다 엄했다는 반증인데, 그중 하나의 사례가 바로 노비의 옛 주인에 대한 범죄 처벌 규정이다.

노비가 여러 가지 이유로 속량(贖良)을 하여 노비 신분을 벗어날 수도 있었는데, 이 경우 노비와 옛 주인은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대명률』에도 노비가 옛 주인에게 욕설을 할 경우 일반인 상호간의 욕설에 준하여 태형 10대로 처벌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노비와 주인 간의 명분(名分)이 엄하다는 이유로 노비 신분에서 해방된 자들이 옛 주인에게 범하는 행위까지도 엄중하게 보고 태형 10대보다 훨씬 무거운 장형 100대에 도형 3년에 처하도록 『경국대전』에 입법화했다.

 

『경국대전』. 중간 부분에 고존장(告尊長) 조문이 있는데, 그중에는 노비가 옛 주인을 모욕, 구타, 고소한 경우의 처벌 형량이 기록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더 나아가 정조 때에는 처 상전의 비부(婢夫)에 대한 징계권을 과도하게 인정하는 규정을 신설하기도 했다. 당시 여종의 남편을 비부(婢夫)라고 하는데, 양인 신분이므로 처의 상전과는 상하 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1793년(정조 17)에 서울 중부에 사는 박소완(朴紹完)이란 인물이 여종의 남편 방춘대(方春大)를 폭행하여 죽게 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처 상전의 비부에 대한 징계권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가 논란이 되었다.

사건은 이렇다. 박소완에게는 한 집에 데리고 사는 여종이 있었다. 이 여종의 남편이 방춘대였는데, 그가 하루는 술에 취해 안뜰로 들어와 박소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박소완이 방춘대의 머리채를 끌어당기고 내쫓는 과정에서 폭행이 있었고, 방춘대는 섬돌에서 넘어져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자 방춘대의 형 방연득(方連得)이 박소완을 관에 고발하여 이 사건이 국왕 정조에게까지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당시 국왕 정조의 사건 처리 방향이다. 정조는 방춘대가 박소완에 술주정을 한 것을 비부의 처 상전에 대한 능멸 행위로 간주하고 분개한다. 따라서 박소완이 술주정하며 자신에게 무례한 방춘대를 체벌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본 것인데, 정조는 이런 식으로 기강을 해치는 비부를 처벌하다가 죽게 해도 처 상전의 형사책임을 감면하는 것을 법으로 삼도록 했다. 이는 노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비부에 대해서도 주인가에 생사여탈권을 주는 형국이었다.

 

과장된 성왕론(聖王論)이 위험한 이유

지금까지 노비 범죄에 대한 형률을 통해서 노비의 형사법상 지위와 당대인들의 인식을 대강 살펴보았다. 앞에서 본 것처럼 법전에 기록된 노비는 철저하게 주인에 대한 의리, 명분을 지켜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노비의 무례, 하극상은 강상윤리를 위반하는 있을 수 없는 일로 간주하여 가혹한 형벌로 바로잡고자 했다. 

물론 이는 법전에 담긴 조문을 넘어 현실에서 이런 규정이 어떻게 작동되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가 조선시대 노비의 성격을 살펴보려면 법규뿐만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당대 이들의 실제 모습을 함께 살펴봐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822년 자매문기(自賣文記). 생활고로 인해 박승지에게 자신들을 노비로 파는 부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사회의 발전적 혹은 긍정적 모습을 지나치게 침소봉대해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는 흔히 세종과 정조대를 ‘성왕(聖王)’의 시대로 묘사한다. 노비 문제만 해도 세종이 관청 소속 노비의 출산 휴가를 7일에서 100일로 대폭 늘려주었다고 마치 노비의 인권을 크게 개선시켜 준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정조가 신분에 따른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노비제를 혁파하려는 구상을 가졌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노비에 대한 형사법적 차별을 담고 있는 형률은 조선시대 내내 큰 변화가 없었음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다른 말로 조선왕조에서 노비 지위를 개선하기 위한 근본적인 개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세종과 정조의 노비 정책을 너무 과장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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