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에 대한 열망부터 진리를 구하는 방법론까지…연암 사상의 정수를 산문으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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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에 대한 열망부터 진리를 구하는 방법론까지…연암 사상의 정수를 산문으로 만나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12.12 0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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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 산문의 멋: 연암 박지원이 감추어둔 보석 같은 생각과 만나다 | 박수밀 지음 | 현암사 | 308쪽

 

연암 박지원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실학자이자 「양반전」, 「허생전」, 『열하일기』의 작가라는 점과 위엄 있는 초상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연암을 뛰어난 작가로만 평가한다면 그의 생애와 문학, 사상을 제대로 살폈다 할 수 없다.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위선적인 양반들과 사회 모순을 지속적으로 비판하였으며 바뀌지 않는 사회 현실에 상처 입고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연암은 북학을 통한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민중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했으며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정철조, 이서구 등 18세기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모인 백탑 공동체를 주도하여 전 분야에 걸친 학문 연구의 장을 마련하였다. 백탑 공동체의 사상은 실학 전반과 북학파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연암은 비유법에 뛰어났으며 자신의 사상과 성찰을 산문이라는 형식에 담는 데 탁월한 시대의 지성이었다. 이렇듯 연암은 조선 시대 최고의 작가이자 고전 지성사에서 중요도로 선두를 다투는 인물이다. 이 책은 그러한 연암의 세계를 그의 산문을 통해 이해하기 쉽게 제시한다.

책의 서문과 발문, 산문, 논(論), 묘비명 등 연암이 남긴 다양한 글에서 중용, 확증편향 지양, 낮은 자세로 임하기, 배움의 덕을 통해 편협한 사고에 갇히는 것을 늘 경계했던 삶의 지향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연암의 마음가짐,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이며 어디서 진리를 구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현대인에게 자신과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저자는 연암의 독창적이며 유려한 비유, 상대방의 고정관념을 인정한 뒤 자신의 주장을 이어가는 설득의 묘, 에피소드로 글을 시작하는 작법 등 문장과 산문 구조에 대한 꼼꼼한 해설을 통해 연암 산문의 매력을 한껏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 널리 알려진 연암의 작품을 떠올리면 그는 사회 비판적 요소가 강한 글을 쓴 작가로 보인다.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에서도 사회적 약자를 내세워 사회적 모순을 우회해 비판한다. 그러나 연암의 탁월함은 비판의 근거가 되는 진리를 구하려는 태도에 있다. 이 책에서는 사회 고발 성향의 바탕이 되며 연암 사상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도의 자세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저자는 「낭환집서」의 이가 옷과 몸 중 어디서 생기는지에 대한 논쟁, 말똥구리와 용은 서로의 말똥과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비유에서 진리의 양면성, 상대성을 읽어낸다. 이는 중용의 덕을 떠올리게 하며, 양편 사이에서 생각하는 경계인의 시각을 가져야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통찰이다.

「능양시집서」에서 연암은 까마귀가 실은 검은색만 띠고 있지 않다는 비유를 통해 경전의 문체(한 가지 색)로만 글을 쓰라 강요하는 현실을 꼬집는다. 저자는 주변 사물을 관찰하여 얻은 진실을 현실의 모순에 적용하려는 태도야 말로 진리에 이르는 길이며 하찮아 보이는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해내는 것은 연암의 창조자적 안목이라 칭찬한다.

「일야구도하기」도 눈과 귀로 느낀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를 전해주는 수작이다. 연암은 하룻밤 사이에 여러 번 강을 건너며 느낀 두려움을 통해 감각기관이 만드는 편견과 선입견을 지적한다. 저자는 연암이 강조한 ‘명심冥心’, 즉 감각기관의 모순을 경계하고 공정하고 순수하게 보는 마음이야말로 참됨에 이르는 길이라 말한다.

「상기」는 코끼리의 상아가 먹이를 먹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통해 조물주가 모든 것을 의도하여 만든 것은 아니며 자연에는 목적의식이 없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신, 하늘, 이理에 의지하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배제한 유학자들을 떠올리며 변화하는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만 규정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전한다.

책 첫머리에 실은 이동원 화백의 〈연암 박지원 초상〉(2017)은 우리가 알던 연암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풍채 좋은 모습과 위엄 있는 낯빛은 그대로지만 세태를 비관한 지식인의 그늘도 엿보인다. 연암의 체념적 정서는 절친한 지기였던 이희천의 죽음과 관련이 깊다. 영조의 정치 공학적 선택에 의해 목숨을 잃은 친구의 모습을 보며 연암은 과거를 접고 더욱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섬세한 감수성으로 문학, 민중, 친구, 가족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시대의 지성은 자신의 감정을 글로 남기는 데 생을 바쳤다.

「영처고서」에서 연암은 『시경』이 당시 민간의 풍속을 담은 자료임을 강조하면서 『영처고』에 담긴 이덕무의 시 또한 ‘조선의 노래’라며 가치 있게 여긴다. 이는 북학에 대한 열망 이전에 실학의 주체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아가 백성들에 대한 연암의 애정 어린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열녀함양박씨전」도 맥을 같이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열녀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하고 여성에 대한, 당시로서는 진일보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회성원집발」에서는 “벗은 반드시 지금 이 세상에서 구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며 친구 사귐의 어려움에 대해 탄식하였으며 「백이론」에서는 의리와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에 대한 깊은 고민을 드러낸다. 연암은 큰 누나를 떠나보낸 후 「백자증정부인박씨묘비명」을 남긴다. 고인을 형식에 맞춰 추모하던 당대의 글쓰기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작품으로 누나를 잃은 개인적 소회와 누나와의 추억을 절절히 담아낸 수작이다. 연암의 사랑은 형과 누나에게 지극했으나 연암은 가족을 하나둘 잃어갔다.

박지원의 글을 자세히 보면 당대 유학자들의 동의를 구하거나 그들의 반발을 약화시키려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연암의 성정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연암의 전략적 글쓰기, 화술, 처세술 등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회를 비판했으되 조선풍을 강조하며 고쳐 쓰려 했고 유학자의 위선을 고발했으나 그들을 설득해 포용하려는 의지를 내비친 연암만의 세계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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