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도시 18세기 한양…돈 앞에 솔직, 연애엔 진심
상태바
욕망하는 도시 18세기 한양…돈 앞에 솔직, 연애엔 진심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12.12 0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한양의 도시인: 선비는 연애하고 노비는 시를 짓네 |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20쪽

 

18∽9세기 조선은 뒤죽박죽 모든 것이 뒤집히고 근엄한 도덕 안에 꼭꼭 잘 감춰두었던 인간 본연의 자연스런 성정과 욕망이 삐죽삐죽 튀어나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 후기의 활력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조선 후기 한양은 낄낄거리며 잡담을 나누는 시정 사람들, 물건을 사고파는 활력으로 넘쳐났다. 나무나 하러 다니는 줄 알았던 노비가 시를 지어 선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시회에 당당히 입성했다. 대부업으로 부자가 된 도시 남자 남휘는 재력으로 비구니를 유혹해 연애한다.

당대 문헌과 한시를 따라 조선 후기 사회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유학에 갇힌 조선’이란 틀에 의심이 간다. 인간 욕망의 긍정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발현된 창작 욕구에서, 우리는 조선의 도회지 풍경을, 문화의 번성과 자유로운 정신의 맹아를 발견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욕망’과 ‘사랑(연애)’, ‘취향’과 ‘여항인’이라는 렌즈로 한양을 들여다본다.

까탈스런 심노숭은 서울 맛만 좋아했다. 그는 진심어린 탐식가였다. 여행 중이라 한동안 면을 먹지 못하자 월정사에서 직접 국수를 뽑아 먹으려 시도할 정도였다. 그는 맛과 같은 감각적 쾌락을 저급하다 여기지 않고 적극 표출했다. 서울 스타일의 음식 맛을 자각한 식도락가이자 음식 비평가로 다양한 음식을 품평했다. 메밀국수를 좋아했다. 고기는 다 좋아해서, 각종 일기에 고기를 향한 탐욕을 고스란히 기록해두었다. 오래 먹을 수 있는 밑반찬으로 장조림을 늘 준비해뒀고, 개장국을 사철 즐겼으며, 닭국과 꿩고기를 자주 먹었다. 평양의 오수집 고기 맛을 섬세하게 묘사했고, 특별히 난로회 요리를 좋아했다. 그가 즐긴 난로회에서는 벙거짓골에 소고기를 구워 먹고 신선로까지 곁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시에서 결핍된 것은 유독 사랑이었다. 하지만 18세기에 귀공자 남휘와 비구니의 연애를 노래한 애정가사 「승가僧歌」 세 편이 대중을 사로잡는다. 이미 혼인한 부자 양반 남휘와 출가한 여승의 사랑을 그린 가사다. 조선시대 사회의 관습과 전통은 젊은 남녀의 자유연애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편의 감정은 금기에 맞선다. 「승가」에는 금지된 연애 실화가 깔려 있고, 젊은 도시 남녀의 욕망이 표출돼 있다. 재미있는 것은 남휘가 대부업으로 치부한 양반이며 여승을 유혹할 때도 호강시켜주겠다고 거듭 강조한 대목이다. 남휘가 비구니에게 자기에게 오라고 설득하는 대목 중 일부다.

고사리 삽주 나물 맛이 좋다 하거니와
염통산적 양볶이와 어느 것이 나을손가.
모밀잔의 비단끈을 종요롭다 하거니와
원앙침 호접몽이 어느 것이 좋을손가.

절에서 먹는 푸성귀도 맛이 좋기야 하겠지만 염통산적이나 양볶이 같은 고기 요리만 하겠는가? 혼자 지내는 것보다 신혼의 단꿈이 훨씬 더 낫지 않은가? 남휘는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쾌락으로 비구니를 설득했다. 비구니가 남휘의 구애를 받아들인 데 낭만적 사랑이 없지는 않으나 현실적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유혹에 넘어간 면도 있다. 「승가」에서는 물욕과 연애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조선 후기를 읽는 또 다른 키워드는 ‘여항인’이다. 잊힌 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시정 사람들의 생활과 정서를 묘사한 문학이 등장했다. 사대부 담론을 피하고 굳이 촌스러운 고담을 하겠다던 희대의 이야기꾼 조수삼의 『추재기이』를 통해 하등의 교훈도 전해주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인간 군상을 돌아봤다. 그는 틀에 안주하여 인생을 산 사람에 대해서는 일부러 관심을 표명하지 않고 굳이 시장 바닥의 마이너리티를 탐구했다. 의리를 아는 거지 왕초 달문, 음란한 소리를 잘 모사하는 의영, 사재기로 한몫 벌어보려는 사심을 품었다가 잘나가던 부잣집 아드님에서 알거지로 쫄딱 망한 팽쟁라 등 당대 기이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간 문화 사각지대에 있던 천민 계층조차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 보인다. ‘정씨 나무꾼’을 뜻하는 정초부는 노비로서는 드물게 한시를 짓고 한양 양반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현학적 표현을 배제한 맑고 담백한 한시로 장안을 사로잡았다. 노비 출신 시인 홍세태는 국왕의 찬사까지 들었다. 영조는 “천류 홍세태라고 부르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렇듯이 사람을 모욕한다면 모면할 자가 누가 있겠느냐?”라고 그를 두둔했다. 영조는 유달리 홍세태를 높이 평가해 문집을 대궐로 들이라 하여 읽기도 했고,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월대의 노래滿月臺歌」를 아주 아름다운 작품이라 칭찬했다.

한양의 떠들썩한 활기를 활동사진처럼 묘사한 「성시전도시」를 통해 한양을 본다. 「성시전도시」는 정조의 기획으로, 그는 고위 관료들에게 한양을 시로 묘사하라고 지시했다. 본래 〈성시전도〉(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 즉 한양 전체를 그린 그림)가 존재했는데, 한양을 그림이 아닌 시로 묘사한 작품이 「성시전도시」다. 시인들은 어명을 받고 쓴 시에서 세속 한양의 면면을 그려냈다. 「성시전도시」 15편 가운데 유난히 돌출한 작품은 박제가의 시다. 그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희궁의 묘사로 시작한 뒤 바로 시장 묘사로 들어갔다. 앞부분은 아래와 같다.

두부 파는 광주리는 탑처럼 높이 쌓였고
오이 담은 망태기 코는 노루 눈처럼 듬성듬성.
꽃게 상자 머리에 이고, 등에는 아이 둘러업고
갯가 아낙 머리쓰개는 푸르딩딩 무명천이로군.
어떤 자는 무게 재보려고 닭 한 마리 들고 섰고
어떤 자는 꽥꽥 소리 누르며 돼지 두 마리 짊어졌고
어떤 자는 땔감 바리 사서 소고삐 끌고 가고
어떤 자는 말 이빨을 본답시고 허리춤에 회초리 꽂고
어떤 자는 눈을 꿈쩍꿈쩍 거간꾼을 불러대고
어떤 자는 싸움 말리며 잘 지내라 타이른다.

시인은 자신의 역량을 시장 묘사에 쏟았다. 독특한 시선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이어받아 저자는 『한양의 도시인』에서 조선 후기의 인정물태를 오늘날 독자들에게 전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