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진화―궁지―전환!…한 사상의 생애사를 깊이 파내려간 지적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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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진화―궁지―전환!…한 사상의 생애사를 깊이 파내려간 지적 고고학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12.12 0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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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주의: 어느 사상의 일생 | 에드먼드 포셋 지음 | 신재성 옮김 | 글항아리 | 828쪽

 

이 책은 자유주의를 마치 인간의 일생처럼 다룬다. 이와 동시에 사상이 어떻게 현실 정치와 맞물려 진화와 전환을 반복하는지 밝혀낸다. 저자는 1830년을 자유주의의 탄생 기점으로 잡아 2017년까지 200여 년의 연대기를 고찰한다. 즉 이 책은 고도로 복잡한 정치사상의 세계를 하나의 줄기로 담아냈다. 자유주의의 변종이나 반대파, 혹은 그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잡다한 그림자를 배제하지 않은 채,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의 주인공은 오로지 ‘자유주의’로만 삼아 그것의 가치를 설파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이 ‘자유’를 믿는다고 말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비자유주의자도 자신이 자유를 옹호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만으로 사람들 사이의 신념을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개념적 혼란이 있긴 하나, 대표적인 서구 사회 네 곳인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에서 ‘자유주의’는 논쟁의 여지없이 정치 관행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 관행은 이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로 널리 퍼져 있다.

누가 자유주의자고 누가 아닌지를 따지는 문제가 걸핏하면 불거져왔다. 자유주의자라면 네 요소(갈등 인정, 권력에 저항, 진보에의 믿음, 모든 이를 시민으로 존중) 가운데 어느 것도 빠짐없이 고수해야 했지만, 그로 인해 변형을 겪거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을 피할 순 없었다. 토크빌은 자유주의자고 마르크스는 아니지만, 마르크스를 자유주의자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자유주의자인가 여부는 ‘정도’에 달려 있었다. 기조와 밀은 분명 자유주의자였지만, 더 순도 높은 쪽은 밀의 자유주의였다. 후버도 자유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루스벨트보다는 약했다. 이런 점은 그가 누구와 협력했는지로 판가름할 수 있다. 19세기 말의 친기업적 자유주의자는 친기업적 보수주의자와 잘 변별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사회지향적 자유주의자는 1945년 이후 친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와 구별하기 힘들었다.

두드러진 예를 들자면 글래드스턴과 링컨은 19세기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였고, 베버리지와 린든 존슨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였다. 사상가 중에서는 밀, 베버, 롤스가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였다. 흥미로운 열외자와 주변적 사례도 있었다. 19세기의 정치가 중 독일의 리히터와 프랑스의 라불레는 비자유주의 체제에서 소수자인 자유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사상가 중 사르트르나 오크숏은 자신한테 자유주의자의 꼬리표가 달리는 걸 경멸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지고의 개인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철학적 숭배나 시스템과 계획에 대한 오크숏의 조롱하는 듯한 의심에서 자유주의적인 무언가를 감지한다.

자유주의는 가슴속에 많은 감정을 품고 있다. 거기에 배어든 사회적 정서와 도덕적 감정은 자유주의가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힘을 발휘하도록 이끌었다. 지배에 대한 증오(저항),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자부심이나 수치심(진보), 부당 행위에 대한 분노(존중), 경쟁적인 도전에 대한 열정(갈등)이 그것이다. 이것들 모두 자유주의의 속성은 아니지만, 이 감정들이 정치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자유주의는 거기에 적절히 목소리를 부여했다. 다른 한편 힘, 부, 도덕적 영광이 딸린 권력은 자유주의의 시기심과 원한 감정을 자극했다. ‘진보’에 대한 열망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집단적 병폐에 대해 눈을 감기도 했고, 수많은 갈등에 맞닥뜨리면 약간 비자유주의적 태세를 취하며 세상이 평온해지길 바랐다.

좌우 이념 관계없이 자유주의의 날카로운 비판자인 메스트르, 마르크스, 니체, 모라스, 슈미트 등은 모두 자유주의적 정서의 그늘진 면으로 자신의 사상을 구축했다. 자유주의의 위대한 연설가인 기조와 링컨과 글래드스턴, 자유주의의 달변가인 클레망소와 로이드 조지, 자유주의의 위대한 작가인 오웰과 카뮈 그리고 절반의 자유주의자인 사르트르는 자유주의적 정서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이해했다. 이들 자유주의자의 면모가 이 책에서 사상들을 관통하며 세밀히 다뤄지고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선 그것의 독특한 기질과 변하기 쉬운 분위기를 유념하며 따라올 필요가 있다.

저자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상황이 아주 절망적이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희망과 절망의 근거를 모두 갖고 있다. 그러니 저자는 메커니즘의 유혹에 저항하라고, 정치의 우선성을 믿으라고 호소한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정치는 논쟁·교섭·타협이 지배하는 일상적 관행이다. 정치의 우선성을 주장할 때 자유주의자들은 공공 영역에서의 우연성과 선택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사회적·경제적·역사적·진화적 추세가 자유민주주의가 반드시 실패하거나 성공할 거라고 하는 데 저항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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