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이라고 다 같은 백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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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이라고 다 같은 백인이 아니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2.12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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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의 역사: 피부색을 넘어 권력과 위신, 아름다움으로 | 넬 어빈 페인터 지음 | 조행복 옮김 | 해리북스 | 580쪽

 

누가 백인인가? 누가 미국인인가? 언뜻 보기에는 자명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자명하지 않은 이 질문에 답하는 넬 어빈 페인터의 연구는 서구 2천 년 역사를 가로질러 현재의 미국으로 당도한다. 이 책은 비백인에 초점을 맞춘 역사 문헌 속의 거대한 빈틈을 메우며 백인의 정체성을 둘러싼 많은 이론과 논란을 촘촘하게 분석하고 종합한다. 

저자는 인종 관념의 발명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목적에서 여러 백인종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온갖 시도를 추적하며 그 과정에서 백인과 백인성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모호하고 배타적이며 허구적인지 드러낸다. 백인은 단순히 피부색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권력과 위신, 아름다움의 표지로서 선택적으로 누구에게는 허용되고 누구에게는 거부되었다.

이 책의 이야기는 백인이라는 관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한다. 당연히 인종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사람들을 구분하게 하는 것은 지리, 즉 어디에 사는가뿐이었다. 백인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노예는 흑인이라는 관념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노예들은 대부분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에 노예제는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제도였다. 이민족에 정복당한 사람들은 그들의 노예가 되었고, 흑해에서 시작된 이 노예무역은 20세기에 오스만제국이 종식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인종주의적 사고는 고비노나 골턴 같은 인종주의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저자는 지성사의 거물들조차 얼마나 인종주의적으로 사고하고, 가난한 종족을 얼마나 열등한 종족으로 경멸했는지 보여준다. 또한 백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백인이 아니었다. 우월한 인종에 대한 열망은 백인 안에서도 위계를 나누었다. 『유럽의 인종』에서 윌리엄 Z. 리플리는 유럽의 인종을 머리지수를 기준으로 튜턴인, 알프스인, 지중해인으로 나누고 순서대로 위계를 부여했다.

저자는 인종의 도가니인 미국에서 일어난 일들에 주목한다. 앵글로색슨족으로 구성된 옛 이민자들은 나중에 들어온 이민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려 했다. 19세기 미국에서 아일랜드인은 흑인과 막상막하의 존재였다. ‘미국인’이 되려면 흰 피부색이 필요했지만, 흰 피부색이 충분조건은 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정복당한 적이 없는 옛 정복자인 강인한 게르만인-스칸디나비아인 혈통에 뿌리를 둔 튜턴인, 색슨족, 앵글로색슨족이어야 했다.

하지만 남북전쟁을 계기로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다. 이민자들이 연방군에 참여해 남부 연합과 싸우면서 아일랜드인들은 서서히 외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는 미국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아일랜드인과 독일인 이민자의 경제적 이익에 봉사했다. 많은 이민자가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새로운 위계질서가 구축되었다. 앵글로색슨족이 맨 위에 있고, 그 바로 아래의 아일랜드인은 조만간 북서 유럽인으로 이루어진 상층에 통합되어 ‘북유럽인Nordic’이 된다.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인은 ‘옛’ 이민자인 잉글랜드 출신 앵글로색슨족과 대비되는 ‘새로운’ 이민자였지만, 20세기에 들어설 무렵이면 아일랜드인 가톨릭교도와 독일인은 ‘옛’ 이민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들이 원래 아일랜드인들이 차지하던 자리로 들어서며 힘든 노동을 하게 되고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앵글로색슨족을 진정한 미국인으로 추켜세우는 데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앵글로색슨족이 우월하다면, 가난한 백인, 본토 태생인 수백만 명의 불쾌한 앵글로색슨족 백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원래부터 떠돌이, 빈민, 범죄자의 혈통을 가진 자들이 백인종에 지울 수 없는 결함을 물려주는 상황을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었다. 단호한 조치, 단호한 과학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이들로부터 사회를 어떻게 보호해야 할까?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자들을 격리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마침내 강제불임시술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1968년까지 약 6만 5천 명의 미국인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불임시술을 받았다. 1890년대 이래로, 미국 연방법은 ‘미치광이’, ‘백치’, 정부의 구호대상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정신이상자, 간질환자, 거지, 무정부주의자, ‘치우, 정신박약자, 신체나 정신에 결함이 있어서 생계를 꾸릴 능력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배제하고자 했다. 1922년 로스럽 스토더드는 『문명에 맞선 반란: 하등 인간의 위협』에서 계급과 인종에 따른 지능검사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 미국인의 IQ는 125에서 92 사이, 평균은 106, 이탈리아인은 84, 유색인은 83. 우월함의 비율은 잉글랜드인 19.7, 아일랜드인 4.1, 이탈리아인 0.8, 폴란드인 0.4.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러한 결론이 당대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고, 그 과학은 이민 제한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봉사했다.

백인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이론들은 모두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최근까지도 인종 혐오에 바탕을 둔 공권력의 폭력과 백인우월주의자의 테러가 종종 뉴스를 탄다. 도널드 트럼프는 인종주의적 발언을 일삼으며 백인우월주의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저 미국의 일인가. 우리는 인종주의와 무관한가. 많은 외국인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과연 백인과 비백인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백인이 아님에도 우리는 백인을 더 우호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반면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혹시 그들을 앵글로색슨족 ‘옛’ 이민자들이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신세계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을 바라보듯이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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