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를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과 지워져가는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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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를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과 지워져가는 노동자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2.12 0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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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없는 노동 | 필 존스 지음 | 김고명 옮김 | 롤러코스터 | 240쪽

 

인공지능, 자율주행, 자동 안면인식 등 스마트한 디지털 라이프가 하루가 다르게 세상을 바꾸고 있지만,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단순 라벨링 작업을 하는 불안정한 지위의 노동자들이 있고, 푼돈을 받고 육체를 갉아먹는 그 노동이 스마트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크라우드 노동의 실태를 고발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현주소를 폭로한다. 나아가 이 파멸적 혁신에 맞서 더 공정한 노동을 보장받을 방법을 모색한다.

앞으로 우리는 인공지능의 도움 없이는 하루하루 살아가기 힘든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알고리즘이 우리의 신체와 공간, 사회를 칭칭 감고서, 마치 생각하는 기계처럼 작동할 것이며, 컴퓨터가 만들어낸 지능이 흡사 공기처럼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당연하게 취급될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눈부신 껍데기를 들추면 그 이면에는 소멸 직전까지 착취당하고 있는 비참한 노동자들이 있다. 풍요롭고 스마트한 세상,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편리한 세상은 사실상 극소수 IT 공룡 기업이 내세우는 환상이거나, 닿을 수 없는 신기루이다.

이 책은 오늘날 스마트한 디지털 라이프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최첨단 인공지능이 아니라 푼돈을 받고 육체를 갉아먹는 노동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검색엔진, 앱, 스마트 기기의 배후에는 언제나 노동자가 존재해왔으며, 이들은 글로벌 시스템의 변방으로 밀려나 인공지능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단 몇 분, 몇 초 안에 끝나는 초단기 작업, 즉 미세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취업과 실업의 상태를 오가면서 하루에 수십, 수백 개의 회사를 위해 일하는 “잉여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저자는 아프리카를 비롯해 라틴아메리카, 중동, 아시아 같은 범남반구에 위치한 저개발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클릭경제’가 바꿔가고 있는 오늘날 노동과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플랫폼을 통해 불안정한 지위에서 수행하는 단순 작업 - ‘미세노동’에 의존하는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며 약 20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미세노동을 중개하는 사이트 덕분에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기업이 바로 현대 자본의 총아인 아마존, 테슬라,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애플 등이다. 저자는 이들 기업이 어떻게 빠른 시간에 가공할 만한 방대한 데이터를 축적해왔는지를 추적한다.

21세기는 금융위기와 만성적 경기 침체 속에서 민주적 제도가 속속 붕괴하고 시시로 기후재앙과 긴축재정에 시달리는 시대다.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 수많은 노동자가 봉쇄령이나 감염에 의해 장·단기적으로 출근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자본 입장에서는 인간의 노동력이 얼마나 불안정한 수익 창출 수단인지 확인하는 기회로 삼았을 테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노동자가 대거 이동하며 고용이 정체된 현상에 대해 저자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왜냐하면 2030년까지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전 세계 노동의 절반가량이 자동화될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예전에는 적절한 수준으로 임금이 지급됐던 일이 앞으로는 자연스럽게 비공식화되고 여러 건의 작업으로 쪼개져 건별로 형편없는 임금이 지급되는 불안정한 형태로 변질될 것이다. 심지어 임금과 권리의 기본 요건을 정해놓은 제도의 간섭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임금, 개인의 권리, 능력 등이 짓밟히는 현실이야말로 현재 자동화가 서비스업에 진짜로 끼치는 영향이지만, 자동화 시스템 도입을 주장하는 이론가들이 외치는 말들, 이른바 일자리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자극적인 말들에 노동자들이 피부로 겪는 현실은 묻히기 일쑤다. 이 책에서는 이 같은 일자리 종말은 그저 연막일 뿐,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은 점점 더 많은 서비스직 일자리가 긱 노동, 미세노동, 크라우드 노동으로 변질되고, 심지어 그런 ‘일자리’란 것들조차 사실상 실직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만일 노동이 놀이가 된다면,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딱히 일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실제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미세노동 중개 사이트들은 세련된 청년들이 소파에서 노트북을 이용하는 사진을 걸어놓고 만일 우리의 멋진 신경제에도 여전히 노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비디오게임을 하거나 옷을 사는 것처럼 재미있는 활동일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암시를 건다. 심지어 ‘노동’이나 ‘노동자’라는 표현이 이런 분위기를 망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직 ‘이용자’ ‘작업자’ ‘플레이어’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저자는 이런 행태야말로 미세노동을 마치 어떤 포부를 갖고 도전해볼 만한 멋진 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노동과 놀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수법에 지나지 않으며, 노동의 정체성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이 시대에는 새로운 저항의 방식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독자들을 설득해나간다. 오늘날 미세노동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현상은 그것이 건전한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증거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 모두가 처하게 될 위기의 불길한 징후로 봐야 하며, 이제라도 우리가 미세노동의 충격적인 생존투쟁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게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진격할 역사의 주체가 그동안 잉여로 간주되어온 수많은 사람들, 임금 노동의 언저리에 있는 플랫폼 노동자들에게서 터져나올 것이라 주장하며, 현재의 배제된 사람들에게서 시작될 투쟁이 좀 더 확실한 비전이 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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