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회'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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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회'를 허하라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 승인 2022.12.1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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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경 칼럼]

마침 오늘은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꼭 43년이 되는 날이다. 만약 그때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적어도 추론상으로 만큼은 이듬해 계엄령 선포나 광주민중항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5․18'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7년 뒤 전두환 정권 말기에 '6․10 민주항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원천봉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와 신군부 잔여 세력의 비호를 받은 박근혜 정권이 탄생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므로 2016~17 촛불항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역사에는 '만약에' 또는 '가령'이라는 가정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 예컨대 우리가 제아무리 어떤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다면'이라고 가정한들 이미 엄정한 법과 제도적 절차를 거쳐 공인된 결과를 손바닥 뒤집듯 되돌릴 방도는 없다. 그래서 총선이나 지선이 치러진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에는 어김없이 '이번에도 국민은 현명했습니다,' '절묘하게 여당과 야당의 의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와 같이 승자와 패자 양쪽을 다독거리는 위무의 표현이 관행처럼 실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3월 치러진 20대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48.6%를 득표하여 47.8%를 얻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불과 0.8%, 26만 7천여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역대 대선 중 두 대표주자 간 차이가 가장 적었던 선거였던 만큼 석패한 쪽에서는 결과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승리한 쪽은 아무리 작은 표 차이라도 합법적으로 확인한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니 승복하는 게 당연하다고 응수했다. 

그러면 19대 대선 결과는 또 어떠했는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명예 퇴진과 촛불 항쟁의 뜨거운 열기 속에 치러진 선거였던 만큼 야당의 절대적 승리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문재인(더불어민주당) 41.1%, 홍준표(자유한국당) 24.0%, 안철수(국민의당) 21.4%, 유승민(바른정당) 6.8%, 심상정(정의당) 6.2%, 조원진(새누리당) 0.1% 등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후보의 득표 결과가 과반에 훨씬 못 미친 41.1%인데 반해 이른바 '보수' 후보 3인의 득표수 합계는 절반을 훌쩍 넘긴 것이다. 이는 보수진영 내 '태극기 부대'가 정권 임기 5년 내내 청와대 길목을 가로막고 '선거 불복' 집회를 이어 가는 빌미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체제는 다수결 원칙에 의해 운영된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처럼 첨예한 진영 간의 대립과 경쟁 구도를 전제로 하는 경우라면 '과반' 다수결 제도를 채택함으로써 국민 절반 이상의 민의가 승패를 결정하도록 유도하는 편이 더 괜찮은 방식일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 선진 민주 국가는 '결선 투표제'를 도입하고 있다. 우리도 진즉 이 제도를 도입했어야 했다. 1987년 직선제 부활 이후 치른 여덟 차례의 대선에서 18대 단 한 번을 제외한 일곱 번의 선거가 과반 이하의 득표율로 당선이 확정되었고, 매번 애꿎은 국민만 불필요한 선거 후폭풍을 버텨내느라 심신이 탈진 상태에 이르곤 했기 때문이다.

문제점이 이렇게 명확한데도 왜 제도를 고치지 않고 차일피일하는 것일까.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 즉 정치권에 몸담은 '핵심 관계자들'이 본인 및 소속 정당의 당리당략과 이해타산 때문에 선뜻 발 벗고 나서지 않았고 현재도 여전히 미온적이라는 것. 그들은 헌법 개헌을 위시하여 정당법과 공직선거법 등의 개정을 통한 정치제도 개편이 시급하다는 여론이 일면 뭔가 바로 할 것처럼 변죽을 울리다 여론이 잠잠해진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닫아왔다. 

사실 우리 사회 어느 영역을 들여다보더라도 20~30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스템화되었고 상거래 절차와 과정이 투명해졌으며 공공 업무상의 전문성과 엄정성도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인천 공항은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최첨단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모범 사례이며, 우체국을 비롯하여 온라인 쇼핑과 택배 서비스는 주문에서 배송까지의 전 과정이 실시간 정보 공유 시스템을 통해 신속하고 투명하게 처리된다.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도 창작물과 지식재산권의 보호․관리에 한층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한마디로 우리 시민의 삶은 이처럼 여러모로 '업그레이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정치권과 정치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1'도 변한 게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대에 뒤떨어진 곳이 정치권이고 가장 덜떨어진 사람이 바로 정치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무능, 무책임, 파렴치, 안하무인, 본말전도, 배임, 횡령, 거짓말, 책임 전가가 모든 '정치적 올바름'의 가치를 무력화하고, 본때 있는 말이 아닌 호통과 삿대질만 난무하는 우리의 국회의사당은 인간 군상들이 모여 싸우고 흥정하는 시장바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여의도 국회는 정치가 실종된 황량한 정치판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대한민국 행정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1월 21일 '도어스테핑'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필자는 현 정부 출범 40일 즈음에 기고한 지난 6월 20일 자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아마추어리즘 40일'이란 칼럼에서 도어스테핑은 '조만간 사라질 풍경'이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했었다. 그 이유로는 윤 대통령이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만 선명하게 제시하고 나머지는 퉁 치고 넘어가기 때문이라고 그의 일방적 소통 태도를 지적했었다. 이러저러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다섯 달이나 더 지속됐으니 예상보다 생명력이 길었던 셈이다. 

주지하듯이, 30년 강골 검사 경력을 배경으로 정치 입문 단 10개월 만에 대권을 거머쥔 정치인 윤석열의 최대 약점은 그의 '입'이었다. 불과 몇 달의 짧은 대선 유세 기간에도 숱한 '설화'에 휘말리자 '어퍼컷' 몸 개그로 어찌어찌 버텨 내다가 마치 총알 탄 사나이처럼 선거 승리를 쟁취했던 그였다. 누가 봐도 준비가 전혀 안 된 후보였지만 그가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이라는 지엄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가장 먼저 지목되어야 할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로 그 단순다수 원칙에 입각한 선거제도다. 이 단심제하에서는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보다 선거 전후의 이러저러한 '풍(風)'과 '운(運)'이 당락의 결정자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가 여전히 무능, 무책임, 파렴치, 안하무인, 본말전도, 배임, 횡령, 거짓말, 책임 전가가 모든 '정치적 올바름'의 가치를 무력화하도록 정치인들을 방치하고 있으며, 또 대한민국 국회가 본때 있는 말이 아닌 호통과 삿대질만 난무하는, 그래서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여 싸우고 흥정하는 시장바닥이 되는 것을 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정치권 입성을 묵인하고 조장한 것도, 야당의 대권후보로 선택되도록 부추긴 것도, 또 최종적으로 그에게 표를 몰아준 것도 다 우리, 즉 '국민'이었다는 것이다.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이 무용한 것이듯,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도 불필요한 시간 낭비일 따름이다. 또한 역사는 반복되는 속성이 있으므로 새로운 촛불 광장의 출현이 또다시 새 정권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역시 순진한 공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환원주의'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 12․12를 5․16의 반복으로, 또 2022 카타르 월드컵을 2002 한일 월드컵의 반복으로 설명할 방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전 세계 축구 애호가들로부터 '젠틀 축구'라고 칭송받은 한국의 축구 경기를 예로 들어 보자. 벤투 감독이 4년에 걸쳐 시스템화한 '빌드업(Build-up)' 축구 말이다. 그것은 2002년 히딩크 감독의 '토털 축구(Total Soccer)'와 전혀 다른 스타일로, 사전 약속된 규칙들에 따라 일관성을 가지고 차분하게 게임을 풀어가는 방식이다. 이 게임은 모든 선수가 관여해야 하며 각자가 맡은 임무를 능동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하나의 팀으로 결과 창출을 도모한다. 이처럼 정교한 로드맵과 선수들의 숙련된 기술 역량을 결합한 시스템 축구 방식이 2002년에 가능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묵은 관행과의 단절은 부단히 밀려오는 새 물결 속에서 누군가가 그것의 시대정신을 포착하는 바로 그 순간에 비로소 실체화한다. 2023년 새해에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비롯하여 제반 정치제도 정비에 우리 '국민'이 직접 발 벗고 나서야만 할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제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소인배 정치인들을 더 이상 방치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며, 무엇보다 그들을 뽑아준 원죄가 바로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시대정신 발굴회의'도 좋고 '국민의제 2023'이라도 괜찮다. 때 놓치고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고 후회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회'를 허하라.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패러다임,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2017), 『한국 민주주의의 새 길: 직접민주주의와 숙의의 제도화』(공저, 2022), 『문화의 이동과 이동하는 권리』(공저, 2022), 역서로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 『책임과 판단』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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