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태조 누르가치는 건주 여진 알타리부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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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 누르가치는 건주 여진 알타리부 출신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2.12.11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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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_ 청 태조 누르가치는 건주 여진 알타리부 출신

 

‘엿볼 점’, ‘끝마칠 필’, ‘집 재’로 구성된 佔畢齋는 '책에 담긴 뜻은 알지 못한 채 입으로 글자만 읊조린다'는 의미로 '책을 건성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조선 성종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雅號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이르기를, “오늘날 교육이라는 것이 대충 읊조리고 책장을 덮어버리는 점필(佔畢)만 되풀이하고 질문만 많이 늘어놓고 언급만 잔뜩 하며 교수가 그 재능을 다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바, 눈에 보이는 것만 되뇌이고, 깊은 뜻에는 달통하지 못하는 학문 풍토를 경계하는 말이다.

조선 동북방 만주에는 오랑캐라 불리던 여진족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었다. 글 위의 왼편 지도에서 회령 부근 송화강과 두만강이 만나는 지역이 오도리 즉 알타리 부족의 주거지였다. 가운데 그림은 이들도 순록 유목민이었음을 알려준다. 고려와 조선왕조와는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조선 초기 오랑캐라며 멸시하던 여진족이라는 야만의 존재가 조선의 조정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주는 김종직의 시가 있다.  


회령의 알타리를 초무하는 사명을 받들어 영안도에 가는 김 판교 제신을 떠나보내다
[送金判校悌臣 奉使永安招撫會寧斡朶里]

해마다 남북으로 가는 옷자락 떨치건만 / 年年南北拂征袍           
웅대한 뜻이 홀로 애쓰는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으랴 / 壯志何嘗賦獨勞
한 나라 부절은 안개비 맞기를 감수하여라 / 漢節不辭衝霧雨
오랑캐 추장은 응당 제 성곽 해자 안으로 돌아갔도다 / 胡酋應已返城壕
모래섬 초목들은 바람 맞아 쓰러지고 / 磧中草木迎風偃
태양 아래 천자의 깃발은 호숫가에 우뚝 서있네 / 日下旌旗傍海高
한주 백병 쯤 물가에서 하루 저녁에 마셔치우고 / 汗酒百壺河朔飮
돌아올 적엔 좋은 시를 많이 가져오리라 / 歸來嬴得玉音褒

(출처: 『佔畢齋集』 卷之十九)

後金(후일의 淸)을 세운 태조의 휘는 아이신 줘로 누르가치(愛新覺羅 奴爾哈赤 1559~1626)다. 年號는 天命인데 만주어로는 아브카-이 훌링가, 몽골어로는 텡그리-인 보슉투라고 한다. 아브카와 텡그리는 각각 만주어와 몽골어로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다.

努爾哈赤(노이합적), 弩兒哈奇(노아합기), 弩爾哈齊(노이합제), 奴兒哈赤(노아합적), 老乙可赤(노을가적), 老乙加赤(노을가적), 老可赤(노가적), 奴可赤(노가적) 등의 다양한 한자 이표기가 존재하는 그의 이름은 누르가치, 누르아치, 누르하치 등으로 음전되는데,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의 만주어 누허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르가치는 누르와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 –가치의 합성어라고 분석하는 것이 맞다. 누르가치의 별호인 奴酋(노추)에서 보듯 그는 누르 추장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따라서 누르는 온누리에서의 누리처럼 ‘세상’을 뜻하거나,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주 이름으로 쓰인 ‘누리스탄’에서의 누르처럼 ‘광명, 빛’을 의미하는 말과 어원을 같이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누르가치의 형제들도 같은 방식으로 지어진 이름을 지니고 있다. 남동생 아이신 줘로 슈르가치(1564~1611), 아이신 줘로 야르가치, 아이신 줘로 무르가치(1561~1620), 모두 ~가치로 끝나는 이름이다. 인명 어미로 사용된 ~가치의 다른 사례로는 몽골어 다루가치(총독), 선비어 타부가치(순록치기), 우리말 장사치(장사가치에서 왔음) 등을 들 수 있다.

독일 출신의 중국학 학자 에릭 해니시는 만주족의 인명 유형을 동물(에제:황소, 옐루:멧돼지), 식물(포도:버드나무, 마카:마늘), 특성(아얀:크다, 바얀:부유하다, 니오왕기얀:푸르다) 등 16개의 범주로 분류하였다. 한편 대만의 역사학자 陳接先(진접선)은 만주족의 인명을 7개의 주요 범주로 나누었다.

우리네 김 씨, 박 씨, 이 씨와 같이 쓰이는 여진족 나라 씨는 納喇氏(납라씨), 納蘭氏(납란씨), 那拉氏(나랍씨) 등으로 표기된다. 나라 할라, 즉 나라 씨에는 강릉 김씨, 경주 김씨, 김해 김씨와 같은 본관에 의해 분류되는 무쿤이라는 하위 성씨가 있다. 훌룬 4부(扈倫四部)라고 하는 4개 부족 연맹체는 하다 나라, 울라 나라, 휘파 나라, 예허 나라로 이루어져있다. 청나라의 마지막을 목도한 자의태후 즉 서태후는 예허 나라 출신이다. 

여진족 말 속에는 몽골어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태양을 뜻하는 몽골어 ‘나라’를 성씨로 삼은 최초의 여진족 인물은 완안(完顔) 여진의 나치불루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 공양왕 4년(1392) 3월 경자일 기사에는 알타리와 오랑캐 사신이 나란히 왔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알타리는 오늘날의 흑룡강성 의란현 알타리라는 곳에 거주하던 건주 여진의 대표적 집단인 알타리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지명이 부족명이 된 것이다. 지명 의란(依蘭)은 당시 조선 자료에는 이란(移蘭)으로 표기되었는데, 숫자 3을 의미하는 만주어 일란의 음차어로 삼성(三姓)을 뜻한다. 그러니까 의란현 내 3개 지역에 여진 3개 부족이 자리 잡고 지명으로 족명을 대신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자식으로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씨를 내려 받은 여진족의 시조 부쿠리용숀(布庫哩雍順)의 첫 정착지가 바로 오늘날 하얼빈 동북쪽 쑹화 강 언덕 일대의 의란현이었다. 부쿠리용숀은 장백산 동쪽 알타리 즉 오돌리 城을 거점으로 삼고 국호를 만주라 하였다. 실제로는 1635년 淸의 2대 황제 홍타이지가 공식적으로 여진족을 만주족이라고 개명한다. 원나라는 이곳에 3개의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고 여진인에게 관작을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원나라가 설치한 3개 만호부 중 오돌리 만호부의 만호직은 누르하치의 선조가 세습하였다. 만호직은 만호를 관리하는 직책을 말한다.

부쿠리용슌이라는 시조의 이름은 『발상세기(發祥世紀)』에 등장하는 장백산 동쪽의 부쿠리산(布庫哩山)과 부쿠리호수(布庫哩湖)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인다. 알타리 부족은 元代에 송화강 하류에 살다가 두만강 상류 회령 일대로 이주하면서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 누르하치에 의해 알타리 여진은 대부분 건주 여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여진족의 족명은 물론 알타리 부족의 지도자, 혹은 추장이자 여진족의 시조로 간주되는 부쿠리용슌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부쿠리가 산과 호수의 명칭으로 쓰였고, 이런 지명이나 동식물의 명칭, 자연계의 현상 등이 인명이나 해당 지역 주민을 지시하는 족명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부쿠리 등의 만주어 명칭의 의미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눈 밝은 학자의 분발을 기대한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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