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해방의 고전 『인간지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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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 해방의 고전 『인간지성론』
  • 이재영 조선대 명예교수·철학
  • 승인 2022.12.1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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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로크의 『인간지성론』 입문 | 윌리엄 우즈갈리스 지음 | 이재영 옮김 | 서광사 | 2022. 11. 20 | 208쪽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89)은 명실상부한 로크의 대표작이다. 로크의 다른 저서들인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89), 『관용에 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1689), 『교육론』(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 1693), 『기독교의 합당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95)과 유작인 『바울 서신 주석』(Paraphrases and Notes on the Epistles of St. Paul, 1707)은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구체적인 정치·사회·종교적 주제에 관한 것이다. 

로크 연구자들은 오랜 세월 『인간지성론』을 경험주의 인식론에 관한 것으로서 다른 저서들과 연관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별도로 연구해 왔다. 하지만 로크의 저서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보려는 최근의 경향에 따라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종교라는 것에 의견을 모으기에 이르렀다. 또한 로크가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며 고위 성직자였던 우스터(Worcester)의 주교 스틸링플릿(Edward Stillingfleet, 1635~99)과 벌였던 논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인간지성론』에 대한 비판과 로크의 해명을 통해 이 책의 철학사적인 의의를 전반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689년의 관용법(Toleration Act)은 비국교도들에게 실질적인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고,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프로테스탄트 비정통설 신봉자가 새롭게 급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1696년 캔터베리 대주교 테니슨(T. Tenison, 1636~1715)은 윌리엄 3세를 설득해서 성경,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39개 신앙 조항(1563년에 만들어진 국교회 공식 교리)에 포함된 것과 다른 용어로 삼위일체를 논의하는 것을 금지하는 왕의 금지 명령(Royal Injunction)을 선포하게 하였고, 1년 뒤 의회는 삼위일체의 부정을 범죄로 규정하는 신성모독법(Blasphemy Act)을 통과시켰다. 로크가 1695년 8월 익명으로 출판한 『기독교의 합당성』은 무신론과 동일시되는 소치니주의(socinianism)를 옹호하며, 1500년 동안 출판되었던 책 가운데 최악의 책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스틸링플릿은 1696년 말 『삼위일체설 변호론』(A Discourse in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에서 『인간지성론』이 반삼위일체주의 운동에 힘을 실어주어서 이신론에 이바지한다고 비난했다. 로크는 신속하게 1697년 3월 스틸링플릿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출판했고, 스틸링플릿은 5월에 첫 번째 답장을 출판했다. 로크의 두 번째 편지는 1697년 9월, 스틸링플릿의 두 번째 답장은 1698년 초에 출판되었다. 로크의 세 번째 편지는 1698년 11월에 출판되었고, 스틸링플릿은 세 번째 답장을 준비했으나 출판하지 못한 채 1699년 3월에 사망하였고 논쟁은 진행되지 못했다. 로크 전집에 수록된  『인간지성론』의 분량은 874쪽이며, 스틸링플릿에게 보낸 로크의 편지 분량은 498쪽에 이른다. 

스틸링플릿의 비판은 로크가 지식을 관념에 국한한 것은 외부 세계에 관한 회의주의를 조장하며, 로크가 실재적 본질과 명목적 본질을 구분하고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 본성을 알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위협하고, 인격 동일성이 의식의 지속에 있다는 로크의 주장은 동일한 물질적 실체가 소생함을 필요로 하는 부활 교리 신앙의 토대를 파괴하며, 물질적 실체의 본성을 알 수 없으므로 그것이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는 로크의 주장은 유물론과 무신론을 지지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로크는 자신은 실체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 실체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자신이 실체를 믿는 근거는 스틸링플릿이 믿는 근거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로크는 자신이 부활을 믿는 이유는 그것이 신의 계시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도덕과 종교의 모든 위대한 목적은 영혼의 비물질성에 대한 철학적 증명이 없이도 충분히 보장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지식을 관념들의 일치와 불일치라는 좁은 범위에 국한하고, 성경에 기록된 계시와 증언을 신앙의 영역에 귀속시키려는 로크에 대해서 스틸링플릿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신앙의 영역에 귀속되면 사람들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서로 다르게 믿을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여 신앙의 신비를 어디까지나 확실한 지식의 영역에 놓고자 하는 것이다. 

신앙과 지식의 구분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우리를 다시 로크가 『인간지성론』을 쓴 목적에 주목하게 한다. 로크는 『인간지성론』의 목적을 “신념, 의견 그리고 동의의 근거 및 정도와 더불어 인간 지식의 기원, 확실성, 그리고 범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는 ‘인간 지식의 기원, 확실성, 그리고 범위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구절을 들어 로크가 진정한 인식론의 시대를 열었다고 보는 데 익숙하다. 로크가 인간은 그 존재와 본성에 관한 정보가 한정된 물체나 마음에 대해 확실한 학문을 형성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의거하여 행위하는 명제들은 대부분 그 참됨에 관하여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는 것들임을 주장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지성론』은 1권에서 기존 학설인 본유주의(innatism)를 반박하고, 2권에서 관념의 기원에 관한 자신의 경험주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며, 3권에서 언어와 지식의 관계를 논하고, 4권에서 지식을 정의하고 지식의 등급과 종류, 한계와 개연성,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논하는 경험주의 인식론의 고전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신념, 의견, 동의의 근거 및 정도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구절에 주목하면 『인간지성론』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의거하는 명제들의 확실성에 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 명제들에 동의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개연적인 명제에 대해 신념, 동의, 의견을 갖게 되며, 개연성은 지식의 부족을 보충하고 우리 삶의 실천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안내자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 로크의 철학은 철학적 이상으로 내세워져 왔던 보편적으로 확실한 지식보다 실천적 지성의 규제적 원리로서 개연성에 더 많은 영역을 내맡기려는 시도인 것이다. 로크의 인식론은 지식의 기원을 논하는 한가한 담론이 아니라, 스콜라철학에서 탈피하려는 경험주의적 전회(empiricistic turn)인 동시에 종교개혁 이후 벌어진 신앙과 지식의 싸움에서 신앙을 지식과 별도의 영역에 놓으려는 치열한 힘겨루기다. 

로크의 관용 사상도 신앙의 영역에서는 어떤 사람도 무오류적인 지식을 갖지 못하므로 그 누구도 자신의 종교적 견해가 마치 신의 요구 사항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에 크게 의존했다. 모든 사람은 도덕과 구원의 관심에서 동등한 토대 위에 놓여 있다. 로크에게 그러한 문제들은 개연성과 신앙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지, 지식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 지성에 관한 그의 고찰은 인간 삶의 주요한 관심사인 도덕과 종교가 대부분 어떤 확실한 지식도 달성될 수 없는 개연성의 문제들임을 보여주려는 시도다. 

『인간지성론』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로크가 본유관념을 부정하고, ‘단순 관념과 복합 관념의 구분’이라는 경험주의 원리를 잣대로 하여 당대의 모든 철학적 주제를 일일이 분석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인간지성론』은 베이컨이 말하는 우상 타파의 정신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다. 철학을 종교의 절대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의 영역을 나누는 칸트 철학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지성론』은 단순히 인식론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사회적 발언을 하고 있는 로크의 대표작이며, 인류 지성사에서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아울러 우리는 데카르트의 물질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를 관념의 다발로 해체하는 영국 경험주의 철학을 인간 지성 해방의 과정으로 보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로크가 『인간지성론』의 ‘독자에게 드리는 서한’에서 밝히고 있는 이 책의 탄생 내력에 주목하게 된다. “(1671년 2월) 어느 날 대여섯 명의 친구가 내 방에 모여 이 책의 내용과는 매우 거리가 먼 주제를 놓고 토론했는데, 우리는 곳곳에서 발생한 난문들 때문에 이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때 나는 문득 우리가 선택한 길이 잘못된 것이고, 우리는 이런 성질의 탐구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자신의 능력부터 살펴보고 어떤 대상이 지성으로 다루기에 적합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티렐(James Tyrell)은 당시 그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문제들은 도덕과 계시 종교에 관한 쟁점들이었다고 밝혔다.  

이 책을 쓴 윌리엄 우즈갈리스(William Uzgalis)는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1년부터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초기 근대철학과 심리철학이다. 2007년에 출판한 이 입문서는 로크 철학 연구의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특별히 지은이는 이 책을 시작하는 1장과 마무리하는 4장에서 로크와 스틸링플릿의 논쟁을 소개하면서 그 중요성을 부각하고 있다. 그는 『인간지성론』에서 로크가 다루고 있는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중요 쟁점들은 종교와 도덕과 정치와 관련하여 더 넓은 함의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유 의지와 결정론, 인격 동일성, 윤리에 관한 논의를 가장 흥미로운 부분으로 꼽는다. 

이 책의 번역을 의뢰 받은 2020년 12월 옮긴이는 마침 정년퇴임 기념 논문으로 “로크와 스틸링플릿의 논쟁”을 쓰고 있었다. 옮긴이는 1988년 “로크의 언어 이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래 로크의 인식론 탐구에 매진하다가 『서양근대종교철학』(공저, 창비, 2015)의 로크 부분을 집필하면서 이 논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옮긴이에게는 이 깨달음이 로크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던 셈이다. 『인간지성론』이라는 항해의 목적지가 도덕과 계시 종교 비판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을 일면식도 없는 미국의 철학자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학문을 하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었다. 그래서 지은이가 독자에게 『인간지성론』의 진수를 맛보게 하려고 종횡무진 애쓰는 모습이 더 마음에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지성론』의 저자인 로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자신이 살던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던 흔적인 『인간지성론』은 오늘날 나에게 여전히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혼탁한 시대에 나는 철학도로서 어떤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가?  


이재영 조선대 명예교수·철학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영국경험론의 추상 관념 문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조선대학교 인문대학장, 서양근대철학회장, 범한철학회장을 지냈으며, 2019년부터 교육부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 진흥심의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경험론 연구』, 『논쟁과 철학』(공저), 『마음과 철학』(공저), 『신일철, 그의 철학과 삶』(공저), 『서양근대교육철학』(공저)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F. 코플스톤의 『영국경험론』, G. 버클리의 『새로운 시각이론에 관한 시론』, J. 로크의 『인간지성론』(공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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