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문자 생활 … 중국과 한국 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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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문자 생활 … 중국과 한국 ⑲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2.12.1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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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중국에는 여성이 전족(纏足)을 하는 풍속이 있었다. 발이 자라지 못하게 해놓고, 작은 발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여성을 속박해 독자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느라고 그렇게 했다. 여성은 문화활동이나 문자생활에서도 배제했다.

여성이 부당한 처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구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女書(여서)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것은 호남성(湖南省) 강영현(江永縣) 일대에서 여성들이 스스로 만들어 자기네끼리만 사용하던 글자이다. 한자 외형이 “多”와 비슷한 것이 많으나 표음문자이다. 부채, 헝겊, 종이 등에다 글을 써서 은밀한 사연을 전하기도 하고, 예물로 삼기도 하고, 노래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것이 한자(漢字)는 남성이 독점한 남서(男書)이고, 배우기 무척 어려웠기 때문에 생겨났다. 여성은 문맹으로 지내야 하는 운명을 타개하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시도는 좋았으나, 1,700여 개나 되는 음절문자여서 익히고 쓰기 불편했다. 사용 지역이 한정되고, 쓴 글이 얼마 되지 않는다. 잊고 있던 것을 찾아내 중국의 자랑이라고 하면서, 2006년에 국가1급문화재로 지정했다. 

한국에서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국왕 주도로 국가에서 만들어 반포했다. 28개 글자로 모든 말을 다 정확하게 표기하며, 배우기 아주 쉬운 장점도 있었다.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를 위해 나날이 편하게 사용하라고 했다. 여성이 “어리석은 백성”의 선두에 나서서, 당시에는 언문이라고 하고 지금은 한글이라고 하는 그 글을 열심히 익히고 적극적으로 썼다. 

한글을 여성들이 사용하는 ‘안글’이라고도 한 것은 ‘女書’와 같은 말이지만, 위상은 아주 달랐다. 한국의 ‘안글’은 전국에서 일제히 사용되었다. 한문과 경쟁하다가, 공용의 글이 되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짓고, 경서 언해에 사용되어 남성이 주도하는 상층문화의 핵심 영역에서 긴요한 구실을 하도록 했다.

한글은 발신자나 수신자가 여성인 편지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아주 긴요한 구실을 했다. 국왕이 어려 선대의 왕후가 정사를 맡을 때, 조정에 전하는 말을 한글 편지에다 기록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편지를 한문으로 번역해 실록에 올렸다.

편지는 글쓰기의 가치를 일상적으로 크게 입증해 남녀 모두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 남성은 한문으로 써 보낸 편지를 베껴두었다가 문집에 수록하도록 했다. 여성은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모아두었다가 무덤에 넣어달라고 했다. 저승에서도 위로를 받고 기쁨을 누리라고  한 그 비밀이 무덤을 이장하다가 발견되는 일이 흔히 있다. 

채무이(蔡無易)의 아내 순천김씨(順天金氏)의 무덤에서 발견된 편지다발은 백 여 쪽이나 된다. 남편이 아내에게 쓴 편지는 “하게” 형의 다정한 말투를 사용했다. 노경의 어머니가 앓고 있는 딸에게 써서 보낸 사연이 특히 애절하다. 가족끼리의 정다운 말을 주고받은 언어 사용 양상을 소상하게 알려준다. 

경북의 지방 사족인 이응태(李應泰, 1556-1586)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내가 써서 남편의 무덤에 넣은 것이 발견되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듯이 나타낸 사랑의 편지라는 점이 놀랍다. 자내 샹해 날려 닐오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  죽쟈 시더니 엇디야 나두고 자내 먼져 가신(자네 늘 내게 이르기를 둘이 머리 희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하면서 탄식하고, 평소에 도 우리 티 서로 어엿녀겨 (남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하려는가)라고 한 것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자내”는 “자네”이다. 아내가 남편을 그렇게 불러 부부가 평등한 관계를 가졌다. “사랑”이라는 말을 오늘날과 같은 뜻으로 썼다.

중국소설은 한문은 물론 백화로 쓴 것도 남성소설이었다. 남성의 삶을 다루는 데 치중하고, 여성은 독자로 근접하기도 어려웠다. 한국에는 한문소설과 국문소설이 있어, 남녀가 경쟁적 합작을 했다. 한문소설은 남성소설이고, 국문소설은 여성소설이었다. 남성소설은 남성의 관심사를 다루고, 국문소설은 여성이 좋아하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것이 예사이다. 여성은 국문소설을 읽기만 하지 않고, 베끼면서 개작했다. 

중국소설의 작자는 본명을 감추고 기이한 필명을 내놓는 것이 예사이다. (施耐庵, 蘭陵笑笑生 등) 한국의 국문소설은 작자가 없다. 여성독자가 작자 이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상인 작자를 찾아내면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다. “일 없는 선비”와 “재주 있는 여자”가 소설을 지었다는 말이 사실로 드러난다. 

180책이나 되는 최대장편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이 여성의 작품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성이라 이름은 남아 있지 않고, 아들(安兼濟)을 알아 신원을 확인하니 애석하다. 작품에서는 나라와 가문이 위기를 겪는 모습을 대단한 규모로 절실하게 그려냈다. 그런 전통이 지금도 이어진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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