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개인과 사회 – 코로나19의 사회사상적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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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개인과 사회 – 코로나19의 사회사상적 검토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12.04 1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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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29강_ 김홍중 서울대 교수의 「팬데믹 시대의 개인과 사회」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네 번째 섹션 ‘생존의 자유와 지구적 위기’ 제29강 김홍중 교수(서울대 사회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팬데믹 시대의 개인과 사회 – 코로나19의 사회사상적 검토


김홍중 교수는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것과의 마주침”으로서의 재난이라 할 “코로나19를 사회사상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의 성찰”을 시도한다. 이는 다음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의 형식을 취하게” 되는데 “첫째,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와 “둘째,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용어에 내포된 ‘사회적’이라는 단어는 과연 어떤 현실, 어떤 대상을 지칭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셋째, 코로나19의 주된 감염 매체였던 비말(飛沫)이 명백하게 보여주는 분산된 자아(distributed self)의 주체성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코로나19를 통해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이다. 그에 대한 답의 키워드로는 인간-너머의 행위자, ‘사회=리스크”라는 현상, 사회-너머의 사회성, 비말의 현상학, 개체-너머의 주체성, ‘안전으로서의 자유’ 혹은 ‘자유로서의 안전’을 제시한다. 

 

지난 11월 12일, 김홍중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29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사유의 강제

나는 코로나19를 사회사상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의 성찰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음 네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의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첫째,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둘째,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용어에 내포된 ‘사회적’이라는 단어는 과연 어떤 현실, 어떤 대상을 지칭하고 있는 것인가? 셋째, 코로나19의 주된 감염 매체였던 비말(飛沫)이 명백하게 보여주는 분산된 자아(distributed self)의 주체성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넷째, 코로나19를 통해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바이러스

재난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우리는 사유를 강제당한다.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밀린다. 이 과정에서 재난은 그 이전에는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특정 존재의 역량을 집합적으로 식별하는 계기를 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재난을 일으킨 행위자(agent)를 찾고,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통치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재난이란 무엇인가? 사유와의 관계에서 그것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우리는 재난 속에서 무언가와 만나고, 그것의 정체를 사고하고, 그것과의 관계를 모색한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와 대면했던 바로 그 존재는 바이러스였다. 바이러스란 무엇인가?

바이러스는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물질을 합성하지도 못하는 유전 단위이다. 그러나 일단 숙주에 침투하여 바이러스-숙주 어셈블리지를 구성하면, 맹렬한 자기 복제를 실행한다. 바이러스는 숙주를 변화시키고(감염), 그 자신도 변화된다(복제).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열망”하는 “궁극적 기생체”다. 분자생물학자 솜페이락(Lauren Sompayrac)은 이처럼 명확한 논리를 가지고 움직이는 바이러스를 ‘생각하는 존재’로 간주한다.

그는 말한다. 만약 당신이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바이러스가 해결해야 하는 다음의 네 가지 생존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첫째,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를 감염시켜야 한다. 둘째,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 내부에서 자기를 복제시켜야 한다. 셋째, 바이러스는 숙주의 방어막을 뚫어야 한다. 넷째, 바이러스는 다른 숙주로 옮겨가야 한다. 바이러스의 움직임은 저 네 가지의 문제를 푸는 방향을 향한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바이러스를 이해하는 것(understanding viruses)”이다.

 

인간-너머의 행위자

21세기 분자생물학자는 인간이 바이러스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이러스가 ‘선택’하고 ‘선호’하고 ‘학습’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에게 모종의 ‘지성’이 있다는 얘기다. 솜페이락이 생각했던 것처럼, 살아나가야 하는 세균의 입장에서 세균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판단을 내려 어디로 움직이는지 봄으로써, 세균을 이해할 수 있다. 세균은 수많은 방향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거기에 먹이가 있음을 ‘감각’하기 때문이다. 기계적 작용이 아니라 선택이다. 해석이다. 해석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살아남지 못한다. 미생물의 세계에도 인간 세계와 마찬가지로 기호학이 있는 것이다. 세균은 해석학자다. 모든 생명 존재는 그것이 아무리 미물이라도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차이’는 선택이며, 선택하기 위해서는 지성적 작용이 있어야 한다.

세계는 생각하는 인간의 정신을 제외하면 오직 물질만이 존재하는 그런 죽은 공간이 아니다. 세계는 활동하고 작용하고 판단하는 수많은 행위자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위치에서, 조건에서, 주어진 능력만큼 절실하게 환경을 읽고, 해석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거대한 얽힘의 공간이다. 인간만이 사고하고, 행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을 넓은 의미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이라 부를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이 스스로에 부여되어 있던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으로 세계를 보는 기준을 삼지 않고, 세계에 가득 차 있는 저 무수한 행위자들을 인정하고, 그들을 진지하게, 인간과 함께 존재하는 행위자로 승인하는 스탠스다.

 

‘사회=리스크’라는 현상

코로나19는 ‘사회’의 의미론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가져온 듯 보인다.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라는 용어를 생각해보자. ‘사회적’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성격이 다른 의미가 들어 있다. 하나는 거리의 ‘물리성(物理性)’이며, 다른 하나는 거리 두기의 ‘규범성(規範性)’이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 두기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감염에 대한 모두의 불안에서 온다. 즉, 거리 두기의 정당성은 시민들이 공유하는 정동(affect)에 뿌리를 둔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세 번째 심층적 의미이다. ‘사회적’이란 형용사는 ‘익명의 누군가와 접촉하여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회는 감염이 가능한 접촉의 반경 혹은 관계다. 사회가 리스크(risk)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리스크’라는 의미론적 전환은 전통적 사회 개념에 비추어보았을 때 매우 새로운 현상이다. 왜냐하면, 근대 ‘사회’는 일반적으로 그 구성원들에게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는 연대의 공간을 의미하고, 따라서 리스크에 대한 대비, 민(people)의 생존을 보장하는 공화주의적 방어막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사회적’이라는 단어는 이제 정확히 그 반대 의미와 연결되고 있다. 그것은 생존의 보장이 아니라 위협이다. 사회는 이제 안전을 주는 장소가 아니라 위협적 마주침의 장소가 된다. 사회생활 역시 감염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고 수행해야 하는 무언가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사회적인 것에 대한 근본 인식의 재검토를 불가피하게 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만나서 하는 상호작용은 이제 사회의 구성 원리가 아니라 해체의 위협으로 인지되고 있다. 사회적 활동, 사회를 이루기 위한 만남이 사회의 존속과 가치를 위협하는 상황은 매우 당혹스럽다. 팬데믹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깊은 고민을 하게 한다. 사유하게 한다. 사회는 과연 무엇인가?

 

사회-너머의 사회성

팬데믹 기간 동안 다수의 사람들이 알고자 했던 것은 확진자들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했으며, 어디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누구와 접촉했는가 등에 연관된 것이었다. 불안한 시민들이 바라본 사회는 영토나 구조가 아니라 선(線)으로 구성된 망(網), 즉 일종의 네트워크였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가 위협적이며 강렬한 감염 네트워크라는 형태로 체감되었던 것이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두 지점은 물리적 공간과 구별되는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않은 곳은 아무리 가깝다 해도 어떤 공유된 세계도 갖지 못한다. 네트워크는 미시와 거시의 구분,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며, 사회를 “섬유, 실, 철사, 끈, 밧줄, 모세관”과 같은 형태로 바라보게 한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우리는 사회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 대신 이런 새로운 사회의 이미지를 체감하기 시작했다. 뒤르케임에 의해 대표되는 근대 ‘사회’는 (국민-국가 내부에서) ‘구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에 의하면, 사회는 실체도 구조도 시스템도 아니다. 사회는 어떤 에너지가 흐르면서 만들어내는 일종의 모방 방사(imitative ray)들의 네트워크다. 타르드에게서 사회는 ‘영역(region)’이 아니라 ‘네트워크’ 혹은 ‘유동체(fluid)’의 이미지로 포착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되는 연결선들의 집합, 서로 다른 연결의 수, 강도, 에너지의 차이를 가진 무수한 연결들의 어셈블리지, 이것이 사회의 실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사회성과 바이러스성(virality)은 매우 흡사하다.

 

비말(飛沫)의 현상학

어원적으로 개인은 분할 불가능한 실체이기 때문에 개인의 내부(내면, 정신, 마인드, 심리)는 그 외부(환경, 자연, 사회, 타자)와 명확히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양자 사이에는 근원적인 관계가 부재한다. 이런 점에서 흔히 근대적 개인을 “봉쇄된 주체(contained subject)”라고 부른다. 서구 근대 문명의 중심에는 합리적이고, 주권적이며, 자율적인 주체가 자리 잡게 되고, 이것이 사회과학적 개인관의 핵심을 이루어왔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이런 개인의 신화적 아우라의 허상을 폭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개인 관념의 기초를 이루는 자기-완결적이고 봉쇄적인 성격이 허구로 드러나는 감염 상황 때문이다. 팬데믹 상황은 평소에 개체로 스스로를 인지하던 인간 행위자들이 사실은 “호흡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감염자들의 신체 주변에는 그들의 호흡을 통해 만들어진 비말의 ‘비산구역(飛散區域)’이 형성되고, 감염자들이 접촉한 사물이나 이들이 분비물을 분사한 장소들 역시 한시적인 ‘비말적 영토성’을 띠게 된다.

즉, 비말을 뿜어내는 행위자가 환경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의 기침은 그의 존재와 분리할 수 없다. 그가 뱉은 타액은 그 사람 그 자체이다. 모든 사물에 자아가 분산되어 있다. 개체-하부적(sub-individual) 수준, 혹은 개체를 관통하는 수준(trans-individual)에서 신체적 역량들이 뒤섞이고 있다. 우리는 개체이기 이전에 같은 숨을 공유하고, 물질들을 공유하는 더 근원적 의미의 공동체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인간들의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 신진대사에 함께 휘말려 있는 지구적 생명체들, 비인간 행위자들 모두의 것이다.

 

개체-너머의 주체성

비말은 말하자면 분산되고(distributed), 비산되고(dispersed), 분사된(sprayed) 자아다. 팬데믹 사회에서 자아는 더 이상 피부 내부에 봉쇄된 내적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으로 퍼져나가는 운동이다. 서구 근대의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아 관념, 그리고 그 자아의 ‘절대적’ 권리에 대한 가치 부여가 팬데믹 상황에서는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요컨대, 바이러스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살과 살, 신체와 신체, 자아와 자아가 일종의 “다공성(porosity)”을 통해 서로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는 이를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 개념으로 포착한다. 신체가 서로에 투과되는 사태를 지칭하는 이 개념에 의하면, 개체의 내부와 외부는 분리 불가능하다. 근대적 개인, 즉 “투과 불가능한(impermeable) 서구적 인간 주체”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이다. 

코로나19를 통해 우리가 학습한 것은 개체가 결코 자기-소유의 자립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아와 환경의 상호 투과는 지구적 생명의 근본 조건이다. ‘모든 것의 모든 것과의 분리 불가능성’이다. ‘개인-너머의 주체성’을 우리가 사고해야 할 필요성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더 이상 ‘홀로세(Holocene)’가 아니라 인간의 힘이 지구 시스템을 변형시키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자명해진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점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다. 인간과 자연은 분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얽혀 있으며, 사실 코로나19 역시 그런 인류세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는가?

코로나19를 맞이하여 한국 사회는 여러 위기를 극복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한국 사회는 코로나19를 비교적 큰 파국 없이 대처해나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때 ‘K-방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고, 마스크나 백신 등 공공 방역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 역시, 미국과 유럽에 비교하면, 큰 소란이나 소동 없이 협조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한국 사회는, 확진자의 동선 공개나 마스크 착용, 혹은 백신 의무 접종이나 개인적 자유의 부분적 제한 등에 대해, 유럽이나 미국과 달리,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겪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사회가 위기 상황에서 소수의 목소리나 이견을 청취하지 못하는 경직되고 반민주적인 사회라는 사실의 방증인가? 혹은 한국 사회에 자유의 관념, 자유의 경험과 가치의 절실함이 부재하여, 생명정치적 ‘위급 상황’에서 자유보다는 생존을 추구하기 때문일까?

이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최근 10여 년간 한국 사회가 겪은 진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일 수 있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 사회를 뒤흔들며 변형시킨 정치적 정동은 ‘안전’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1990년대의 여러 재난에 이어 IMF 외환 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고통을 겪으며 21세기를 통과하면서 ‘안전한 사회’에 대한 집합적 열망을 정치화한 것이다. 광우병을 일으키는 프리온(prion), 아이들 방에 뿜어지는 가습기의 화학 물질, 학생들을 태운 여객선의 관리 상태, 여성의 삶을 위협하는 일상적 폭력, 이 위해의 시스템을 차단, 관리, 조절하는 것, 즉 안전(security)에 대한 꿈이 한국 사회를 끌고 간 핵심 정동 중 하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안전이라는 가치가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보편적 근대성의 가치들과 연결되어 창조적 변형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평등을 ‘안전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는 ‘안전으로서의 자유’ 혹은 ‘자유로서의 안전’이라는 매우 독특한 관념에 도달했다. 한국 사회는 안전이 결핍된 존재자들의 새로운 연대, ‘피해자에 대한 박애’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어떤 생명도 그저 단순하고, 벌거벗은 생명일 수 없다. 생명과 안전을 향한 욕망은 각자도생이나 이기적 안녕에의 열망으로 비판될 수 없다. 생존은 21세기적 생태 위기, 즉 제6의 멸종이라는 위협 앞에 있는 세계에서 다른 어떤 정치적 가치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로 재구성되고 있다. 민중의 생존권은 단순한 경제적 권리 요구가 아니라, 총체적 존재의 권리와 무관하지 않으며, 타자를 감염시키지 않아야 하는 의무도 고전적 의미의 자유 개념을 넘어서는 위험 사회의 새로운 시민 윤리로 읽혀야 한다.

한국 사회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보여준 것은 안전이 어떻게 공적이고, 정치적이고, 집합적인 가치가 되어 ‘나’의 안전을 넘어서는 ‘우리’의 안전, 그리고 좁은 의미의 ‘우리’를 넘어서는 안전으로 진화할 수 가능성이었던 것이 아닐까? 즉, 인간-너머의 존재들로 확장되는 어떤 ‘함께-살아남기’의 사상, 그 씨앗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뿌려진 것일 수도 있다. 아직 한국 사회는 생태 감수성도 낮고, 기왕의 발전주의의 힘이 너무 강력하여 세계를 여전히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경제적 영토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금 지배적인 것이 영원히 지배적인 것으로 남을 까닭은 없다. 빠르게 변화하고, 역동적으로 진화하는 우리 사회의 역량이 우리를 발전주의를 넘어 새로운 생태주의적 감수성으로 이끌고 가는 것은 우리가 미래를 희망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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