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라캉파의 중심인물 자크 알랭 밀레의 사상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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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라캉파의 중심인물 자크 알랭 밀레의 사상적 개요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11.28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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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식을 넘어선 현실계: 자크 알랭 밀레와 라캉 오리엔테이션 | 니콜라 플루리 지음 | 임창석 옮김 | 에디투스 | 168쪽

 

이 책은 라캉 해석의 기준이자, 현대적 상황과의 대결 속에서 ‘라캉의 중재자’를 넘어서 ‘현대의 라캉주의’를 구축한 자크 알랭 밀레, 그의 제자 니콜라 플루리가 소개하는 자크 알랭 밀레와 정신분석 이론의 개요를 요약한 책이다.

자크 알랭 밀레는 자신을 단순히 라캉의 중재자라고 정의하지만 그의 역할은 분명 이를 넘어선 것이다. 「구조의 작용」이란 글을 통해 ‘구조주의적 라캉’ 해석을 선보인 치밀한 독법에서 나아가 라캉의 말년 라캉을 라캉과 대립시켜 읽는 일명 ‘라캉 콘트라 라캉’이라는 단절의 독법을 프로젝트로 제시함으로써 라캉 사후 현대 라캉주의의 방향을 암시한 바 있는 그는, 무엇보다 라캉에 의해 승인된 해석가로서 이후 프로이트 대의파Ecole de la Cause freudienne의 지도자로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신분석의 발전, 그 이론과 임상, 세계정신분석협회Associa- tion Mondiale de Psychanalyse(AMP)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발전에 공헌한 명실상부 이 시대의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말라르메적이고 응축되어” 있는, “헬라클레이토스적 의미에서 어둡고 난해한” 라캉의 존재와 그의 언어를 “볼테르적인 문체로 번역하여 접근 가능한 것으로” 빛을 비추어 준 그의 해석학적 열정과 노력이 없었다면 라캉의 사상은 그저 난해한 고전으로 파편화된 해석의 대상으로 머물렀을지 모른다. 다양한 주제와 분야의 라캉이 존재할 수 있고(해야 하고), 해석의 다양성은 당연히 열려 있어야 하지만, 현대적 상황과 대면하여 무엇이 진정으로 라캉주의 정신분석의 태도와 입장일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략될 수 없는 한 자크 알랭 밀레가 소환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자크 알랭 밀레에 대한 전반적 탐구를 시도한 책이다. 밀레의 제자이며 그 자신 정신분석가인 플루리는 일종의 사상적 연대기 형식을 통해 그간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자크 알랭 밀레 정신분석 이론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정리를 시도한다. 밀레의 사상적 궤적을 스케치함으로써 21세기 초에 시작되어 지금도 실천되고 있는 라캉(적) 오리엔테이션에 의한 정신분석 조명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자크 알랭 밀레의 사상을 독해하고 그것을 탐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라는 바람, 딱 그만큼에 부합하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플루리의 이 개론서의 특징은 그것이 이론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데 치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가 이 책에서 라캉파의 대수학적 문자(마템)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가 다루는 대상인 밀레가 다른 라캉주의 이론가와 다른 특징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을 때까지 임상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라캉과 마찬가지로 밀레 역시 이론주의적, 정치주의적 라캉 해석에 몰두하는 자칭 라캉주의자들과 구별되게 정신분석 임상의 현장에서 라캉적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신분석의 윤리를 세공해 왔다. 철학은 그 내적 구조와 그 명령에서 상상적인 것(상상계)으로 나아가 버린다. 정신분석 입장에서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해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듣는 것d'entendre이었다. 정신분석은 다른 무엇보다도 각 증례의 특이성 singularite으로 구성되며, 정신분석에 일관된 이론적 작업이 확실히 있다고 할지라도, 우선시되는 것은 언제나 임상이었다. 그러하기에 현대 라캉주의의 이론적 작업은 상징 시스템이 재편성되고 변화하는 문명적 상황에 따라 새로운 임상에 적용되면서 영구히 열린 상태로 남는 것이다. 

분석경험을 무엇보다 중시하며, ‘섬세한 것’ 혹은 실존의 특이성에 주목해 온 밀레는 1998년 ‘보통정신병’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과거에는 기이한 것extraordinaire이었던 정신병이 우리에게는 보통의 것이 되었다”라고 설명하는 것도 정신질환자를 주체로 복권시키려는 정신분석가 밀레의 일관된 노력의 산물 중 하나이다.

밀레의 관점은 일관되게 현실계를 향해 있다. 임상 현장에서의 전이와 해석의 효과를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확정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가 얻을 수 있는 정치적 효과는 증례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중요한 것은 주체 각자가 겪는 분석경험을 완수하도록 하는 일이다. 정신분석은 정치적 이상주의가 강화되는 현실에서 일종의 탈이상화를 유도한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좌익 활동에 바친 밀레가 그 이상주의를 버린 것도 분석경험 안에서였다. 

과학적 디스쿠르는 사회 변화에 대한 기술주의적이고 낙천주의적 관점을 불러 왔다. 이는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고 보고 철학자로 하여금 더 유익한 선善을 발견하는 일에 전념케 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 상실을 사회적 이상을 통해 보상받으려 하며 나치의 전체주의는 어쩌면 존재 상실과 사회적 이상의 충원물이 접속되어 빚어낸 환상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시장市場이 이어받고 있다. ‘즉효성’의 만족을 주는 대상들만 생산되고, 향락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결여만이 생산되는 시장과 이를 떠받치는 쾌락을 맛보는 데에만 도움을 주는 자율 규제의 지식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신적 섭리자인 것이다. 밀레는 이러한 현실에서 이데올로기 전쟁에 몰두해 왔는데 그것은 인간 존재를 모든 측면에서 지배하기를 더욱더 요구하는 수치 지상주의나 인지주의자들에 맞서는 것이다. 

플루리의 책이 자본주의 전반에 대한 정치적 비판으로 확장되고 정신분석을 자본주의가 봉착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지렛대로 삼으려 하는 밀레의 인식적 지평의 전체를 보다 구체적이고 역동적으로 설명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적지 않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미궁 속에서 인간이 주체로서의 욕망을 견지하고 자신의 특이성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한계와 대면하며 나아가는 현대 라캉파의 중심인물 자크 알랭 밀레의 사상적 개요를 정리해 내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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