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만능주의로부터 사회의 자율성 회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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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만능주의로부터 사회의 자율성 회복을!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0.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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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사색]

2016년 촛불집회를 ‘촛불혁명’으로 승화시킨 주장이 꽤 많다는 걸 알지만 솔직히 사회과학자로서 나는 그러한 진단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이 개념을 과학적·역사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혁명 발발의 전과 후가 분명해야 할 텐데, 촛불집회 이후 정권교체를 경험한 것 말고는 특별히 무엇이 달라졌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혁명의 성과라는 전리품이 분명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혁명의 역동성이 무엇인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굳이 촛불혁명에 담긴 능동적 시민의 염원을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면, ‘유기적 위기’ 즉, 낡은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개혁이 중단없이 지속되길 바라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민주화, 경제의 민주화, 사회(일상생활)의 민주화를 지속해서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사인 셈이다. 그렇지만 이 정도 규모로 영향력이 있는 사회운동에 대한 정치적 수사라면 굳이 개념의 엄밀성을 논한다 치더라도 그 의미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촛불집회의 성과가 무엇인지 현재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통해 차분히 성찰할 기회를 가져보는 것이 이제는 필요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2016년 촛불집회에 남녀노소가 세대를 가로질러 참가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던 것 중의 하나는 ‘이게 나라냐’는 공감력이 매우 큰 단순한 구호였다. 최순실을 비롯한 소수 사인에 의한 국가권력의 사유화는 국정의 마비를 불러왔고 이는 신자유주의적이면서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통치방식에 고통받고 있던 대중의 커다란 분노를 촉발하였다. 국정농단 사태는 헌정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새롭게 출발한 정부의 일성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즉, ‘국가의 정상화’라고도 하겠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권교체 이후 드러난 ‘정상화’의 모습은 촛불에서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서초동과 광화문 집회,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사건 사고만 터지면 불이 나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노사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노정관계만 남은 듯한 노동정책까지 모든 정치경제적, 사회적 이슈는 흡사 블랙홀처럼 국가로 흡수되어 전방위적이고 전능한 국가의 회귀를 요구하는 역설에 시달리고 있다. 다른 세계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국가 만능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흡사 사극에서나 듣던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천부당 만부당하옵니다’ 라는 멜로디가 귓가에 맴돌기 시작한다. 언제 촛불시민이 국가에 모든 문제해결을 위임하였나? 그것은 정치 엘리트들의 착각 혹은 헛된 희망이 아닌가? 정치 엘리트들은 촛불집회 이후로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에 불과한데 어느덧 호랑이를 조종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노의 정치, 증오의 정치, 댓글 정치이다. 솔직히 난 임미리 교수의 기고문을 보고도 이게 이렇게 사달이 날 줄도 몰랐다. 그냥 세간에 있던 평범한 비판 수준이고, 이렇게 난리굿을 치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정치의 사법화 현상인 고발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물론 이 현상은 비정규적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상으로 이미 엘리트 블록 내부의 전쟁으로 시작된 것이나, 이제 태극기 부대가 광화문을 점거한 이후 동원의 정치까지 등장하여 일반시민들에게조차 학습되기 시작하였다. 촛불의 일탈이다. 사회문제의 과잉 정치화 현상이다. 사회적 현상과 그에 대응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언술은 곧바로 리스트업되고, 진영싸움이 개시된다. 과거와는 달리 정치인은 물론 법조인, 교수 등 성찰없이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엘리트들의 논증은 이제 인터넷에서 단박에 부정되고, ‘네까짓 게 전문가냐’ 조롱의 대상이 된다. TV에는 과거와는 달리 수입구조가 취약해 영업이 어려운 전문가들이 일부 성공한 롤모델을 따라 정치신인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정치평론도 아닌 진영논리를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다. 이들의 멘트도 결국은 사회문제는 국가가 모두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책임하고 무식한 정치의 과잉화이다.

다시 촛불로 돌아가 보자. 내가 보기에 일련의 촛불집회가 보여준 가장 큰 의미는 지배 엘리트의 통치성에 대한 대중의 도전이다. 정치권의 무능에 대한 능동적 시민의 응징이다. 보수정당이 촛불집회의 원인을 제공하고 타킷이 되었다고 이제 시민들은 여당 엘리트에게 자동적으로 소위 ‘까방권’을 주지도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비판의식을 제도정치와 법치가 점유한다는 데 있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개혁은 낡은 제도정치의 타파에 있는데 여전히 정치의 의인화, 물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개혁의 프로그램이 없고, 사회가 자율적이기 못하기 때문이다. 진보정당발 ‘계몽의 정치’조차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시민단체가 국회나 지자체에서 입법 혹은 조례제정 논의에나 집중하는 순간 정치의 사법화와 과잉화는 피하기 어렵다. 정치개혁보다 어려운 것이 사회의 조직화이고 사실 이는 진보운동의 전통적 과제이기도 하다. 노동자든, 청년이든, 여성이든, 지역이든 이제는 사회의 일부가 더 적극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고 연대하는 자율적인 정치의 공간을 획득할 시기이다. 시장의 폭정을 대변하였던 신자유주의를 국가 만능주의로 해결하길 바라면 결국 트럼프, 아베, 두테르테 등과 같은 권위적 정치인을 불러올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려면 결국 사회의 능동적 자율성 회복이 절실하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비판사회학회에서 발간하는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한국이론사회학회 부회장,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고 있다. 주 연구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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