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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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배세진 박사·정치철학
  • 승인 2022.11.2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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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미셸 푸코』 (프레데릭 그로 지음, 배세진 옮김, 이학사, 199쪽, 2022.10)

 

동시대 최고의 사상가 미셸 푸코에 관한 프랑스 최고의 주석가 프레데릭 그로의 입문서 『미셸 푸코』는 옮긴이가 「옮긴이의 말」에서 지적했듯 ‘주체, 주체성, 주체화’라는 푸코의 항구적인 철학적 대상을 단 하나의 유일한 사상적 원인 또는 동력으로 취해 초기, 중기, 후기 푸코를 단 하나의 푸코로 결합한다. 그로는 푸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주체, 주체성, 주체화라는 철학적 대상을 가지고서 사유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옮긴이가 「옮긴이의 말」에서 지적했듯 그의 이 저서가 시도하는 바는 ‘일원론적 푸코 해석’이다. 여기에서는 『미셸 푸코』가 제시하는 푸코 사상에 대한 서술 흐름을 간단히 재구성해봄으로써 푸코 철학의 항구적 대상이 주체, 주체성, 주체화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도록 한다(이 글은 오직 이 저서 『미셸 푸코』만을 직접적으로 참조하며, 직접 인용 시 쪽수만 표기한다). 

『미셸 푸코』의 1장 ‘인간과학의 고고학’은 초기 푸코의 사유를 재구성한다. 그 시작점은 1961년의 저서 『광기의 역사』인데, 『광기의 역사』의 핵심이자 결론은 “광기의 근대적 경험”이 “인간학적”이며 광기에 대한 근대의 역사적 태도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진실로서 파악하도록, 자기 자신을 과학적 대상으로 간주하도록” 해주었으며, 이로써 근대에 “광기에 대한 인간학적 경험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과학이 성립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지점은 이러한 광기라는 근대의 인간학적 경험이 “부정적 경험”, “인간적 진실의 상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초기 푸코에게는, 광기의 근대적 경험으로부터 탄생하는 심리학을 포함한 모든 인간과학이 이렇듯 인간적 진실의 상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부정적 경험에 기반해서만 “실증적 진실”을 언표할 수 있다(42-43쪽). 

이는 1963년의 저서 『임상의학의 탄생』에서도 동일하게 제시되는 테제인데, 이 저서의 핵심은 ‘개인에 대한 과학’으로서의 임상의학이 ‘죽음’의 의학적 사고로의 통합으로 인해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광기의 역사』에서 『임상의학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심리학과 임상의학의 사례를 통해 푸코가 주장하는 바는 “역사적으로 인간과학은 자신의 출현 조건을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시험한 경험들 안에서 발견했다”는 것, “인간에 대한 과학의 실증적인 진실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 옮긴이] 붕괴의 지점들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48쪽).

인간 죽음의 부정적 경험으로부터 인간과학이 탄생한다는 이러한 사유는 동일한 시기에 푸코가 전개한 문학(특히 불문학)에 대한 성찰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푸코는 인간 죽음 경험의 모델 중 하나가 ‘글쓰기의 실천’이며 이 글쓰기의 실천이 문학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48쪽). 푸코는 죽음이 “글쓰기의 근대적 경험을 깊숙이 관통”하며, 문학은 “글을 쓰는 주체 그 자체”가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글쓰기를 통해 주체가 자기 자신을 실현하거나 재발견하는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로 인해 주체가 “자기 자신을 박탈당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주체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구성적 통일성을 경험하는 대신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주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푸코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하는 주체의 이러한 소멸은 아마도 작품의 중심 자체에서의 더욱 내밀한 부재, 즉 작품 자체의 부재가 초래하는 간접적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52-53쪽). 

 

푸코 저작들

이렇듯 푸코에게서 문학 즉 “근대적 글쓰기의 존재 양식”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작품의 부재” 그 자체이다(53쪽). 『광기의 역사』에서의 광기와 심리학에 대한 탐구, 『임상의학의 탄생』에서의 죽음과 임상의학에 대한 탐구, 문학 연구에서의 작품의 부재와 문학에 대한 탐구 모두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관해 에티엔 발리바르가 활용한 표현을 가져오자면) ‘주체의 파면’(또는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의 죽음’)이다. 

이러한 주체의 파면이라는 (지극히 구조주의적인) 사유 경향은 1966년의 저서 『말과 사물』에서 정점에 이르게 되는데, 이 저서에서 푸코는 “지식의 익명적이고 원초적인 배치”로서의 ‘에피스테메’에 관한 ‘고고학적’인 연구를 수행한다. 하지만 푸코는 『말과 사물』의 출간 이후 전개한 파리의 지식인들(특히 장-폴 사르트르)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담론의 존재”를 발견하고, 1969년의 담론이론에 관한 방법론적 저서 『지식의 고고학』에서 “규칙적 실천으로서의 지식의 담론에 내재된 형성 규칙들”에 대한 탐구에 집중한다. 『말과 사물』이 사회적 실천에 대한 에피스테메의 엄격한 자율성을 표방했던 것과 달리, 『지식의 고고학』은 담론과 사회적 실천 간 관계라는 질문에 천착하면서 이 질문에 “담론의 실천에 관한 형성 규칙”이라는 답변을 제출한다. 『지식의 고고학』의 푸코에게 이 담론의 형성 규칙은 “어떠한 논리적 선행성도 없는 지식의 내재성(이는 초월론적인 것이 아니다) 내에서 작용하며, 사회적 실천과 직접적으로 절합”되는 것이다. 결국 푸코는 담론의 실천이라는 새로운 개념적 작용을 도입함으로써 『말과 사물』의 구조주의(정확히는 사람들이 남용하는 부정확한 꼬리표로서의 구조주의)로부터 벗어난다. 『지식의 고고학』의 방법론적 목표는 “담론을 다른 실천들 가운데서 규제된 특수한 실천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분석 도구를 정교하게 제작”하는 것, 그리고 “초월론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것 사이에서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자신의 저항 자체에 있어서 역사적 실천에 의한 변형에 영향 받는, 그러한 규제된 실천으로서의 지식의 담론을 기술하기 위한 제3의 길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문서고의 정치화”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핵심은 “담론을 그 존재, 실천, 사건의 차원에서 사고”함으로써 “사회적 실천과 담론적 차원을 결합”하는 것이다(79-83쪽).

『미셸 푸코』의 2장 ‘권력과 통치성’은 중기 푸코의 사유를 재구성한다. 사회적 실천과 에피스테메 간 관계를 사유하지 못하는 『말과 사물』에 대한 일종의 자기 비판의 일환으로 『지식의 고고학』에서 담론 개념을 통해 담론의 차원과 사회적 실천의 차원 간 관계를 사유하게 됨으로써, 푸코는 담론 이면의 ‘지식의 의지’ 또는 ‘힘관계’(결국 ‘권력’)라는 차원에 대한 사유로 나아간다.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취임 강연록인 『담론의 질서』는 푸코가 바로 이 지식의 의지 또는 힘관계, 더 나아가서는 권력이라는 차원에 대한 연구를 개시함을 알리는 선언문이다. 『담론의 질서』에서 푸코는 “담론의 물질성과 사건의 차원”에 도사리고 있는 “담론의 힘과 위험을 제거하는 모든 과정”을 상술한다. 이러한 담론 제한의 과정은 “담론의 물질성”과 “담론의 폭발이라는 우연으로 특징지어지는 불연속성”, 그리고 “말이라는 사건의 환원 불가능한 다수성”을 피해가기 위한 것인데, 담론의 존립을 위해 이러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는 “결여가 있는 익명의 면으로서의 담론은 동시에 역사적 실천들과 직접적으로 결합되며, 의식적 주체에게 자신의 규칙적인 시간적 전개를 규정해줄 하나의 기원으로서의 단단한 단일성이 주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정초적 심급으로서의 담론이라는 것이 그 주체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의 전통적 역사 전체가 “얼굴이 없는 이러한 담론의 무의미한 필연성, 위험한 물질성, 불안한 우연들에 대한 부인 속에서 쓰여왔”던 반면, (지식의 ‘고고학’을 넘어서는) 지식의 ‘계보학’은 “담론을 인간학적 종합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그 고유의 존재 속에서 복원하려 시도”한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계보학적 연구 속에서 담론 이면에 존재하는 지식의 의지 또는 힘관계, 결국 권력이 사유된다(85-87쪽). 

원서

이러한 권력 그 자체를 사유한 결과물이 바로 1975년의 『감시와 처벌』인데, 여기에서 푸코는 규율 사회의 메커니즘을 연구함으로써 규율 권력 개념을 확립하고 이로써 권력에 관한 새로운 사유를 제시한다. 그 핵심은 권력에 대한 ‘실체론적 모델’과 ‘법 모델’(특히 ‘마르크스주의적 모델’) 모두를 거부하는, 권력이 “점유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는 것”이라는 테제이다. 권력에 관한 이러한 이해의 연장선상에서 푸코는 한편으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권력을 “영구적 전쟁”으로 사유하는 방향으로, 다른 한편으로 『섹슈얼리티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에서 권력을 “억압하지도 금지하지도 않”으며 그 대신 “유발하고 생산”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118-121쪽). 

특히 『섹슈얼리티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에서 푸코는 권력에 관한 ‘억압 가설’을 비판하고, 『지식의 고고학』과 『담론의 질서』에서 정교구성한 담론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섹슈얼리티의 체계적인 담론화”, 섹슈얼리티에 관한 “다양한 제도에 의해 조직된 담론이 수행하는 광범위한 촉진”에 대해 논한다. 이를 수행하는 ‘섹슈얼리티의 장치’에 관한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서구 사회가 섹슈얼리티를 “욕망이 전개되는 장소”이자 “욕망하는 주체의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는 장소”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석의 결론은 “금지된 섹슈얼리티의 역사라는 관념의 거부, 권력의 억압적 메커니즘이라는 이미지에 대한 비판”이며, 권력이 “금지의 심급이 아니라 생산의 심급, 즉 섹슈얼리티의 지식과 형태에 대한 생산의 심급”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지점은 서구 사회에서 섹슈얼리티의 장치가 “주체와 그 욕망의 진실”을 쟁점으로 취한다는 점, 그래서 권력은 주체의 진실을 통해 작동하는 생산 심급이라는 점이다(122-127쪽). 

그로가 지적하지는 않지만, 옮긴이의 생각에 푸코는 섹슈얼리티 장치 개념을 근대사회에 구성적인 두 가지 권력인 규율 권력과 생명 권력 간 연결고리로 삼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더 나아가 권력, 진실, 주체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인식하게 됨에 따라 1978년 권력 개념을 거의(?) 대체하는 것으로 보이는 ‘통치성’ 개념을 제시하는데까지 이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로가 지적하듯 바로 이 통치성 개념이 푸코로 하여금 “타자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통치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라는 텍스트를 경유해 “주체화의 실천에 대한 최후의 분석으로 이행하게 해”주는 것이다(127쪽). 

그로의 설명에 따르면, “사실상 푸코가 1970년대 전반기에 사고했던 권력 개념은 수많은 수동적 기입점으로서의 지식과 주체성을 포함했”을 따름이며, “계보학을 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역사적으로 규정된 권력관계들이 지식의 형태와 주체성의 형태의 모체들로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규범과 맺는 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로서의 “개인”을 생산하고 “인간과학”을 “진실의 의례”로 취하는 규율 권력에게 주체란 지식과 마찬가지로 수동적 기입점 중 하나에 불과했다. 반면 통치성의 문제 설정은 “수많은 변별적 평면으로서의 지식의 형태들, 권력의 관계들 그리고 주체화의 과정들 사이의 절합”이라는 관념을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푸코는 “주체들에 대해, 그리고 지식의 도움으로” 통치가 확립된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지식의 형태들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주체성 - 옮긴이]의 형태들은 점점 더 권력의 단순한 의족으로서가 아니라 통치성의 과정의 절합 지점들로서 사고”된다. 이로써 푸코에게서 저항의 문제는 이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유되는데, 그 핵심은 “주체성으로부터 주어진 형태들 또는 규정된 지식들이 통치성의 특정한 과정들에 대한 저항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규율 권력을 통해 정교구성된 이전의 권력 개념은 “너무 무거운 권력 개념”으로 저항을 사고하는 것을 방해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 내에서 “저항은 단지 힘 관계의 한 양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섹슈얼리티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에서 푸코가 강조하듯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반면 통치성의 문제설정은 권력에 대한 저항을 더 적극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통치 형태들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이러저러하게 통치받는 것을 거부할 수 있으며, 다른 이론적 담론들로부터 또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부터 주어지는 통치 과정들과 결합된 지식의 형태들 또는 주체성의 형태들에 반대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통치라는 이러한 새로운 개념을 통해 푸코는 자신의 고유한 작업을 주체(그리고 지식)와의 관계 속에서의 “저항점들의 도입”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된다. 권력의 작용을 ‘타자들의 행동에 대한 행동 양식’으로 규정할 수 있게 해주는 통치라는 개념과 그 상관관계 속 주체 (그리고 지식) 개념을 통해 푸코는 기존 권력론이 빠져있는 “법률적 모델과 전략적 모델 사이의 이항 대립으로부터 벗어나 권력관계에 [주체의] 자유의 작용을 도입”하는 것이다(127-129쪽).

 

사진: https://www.victorshammas.com/blog/2021/4/30/michel-foucaults-library-of-inscription-copies

푸코는 통치성 개념의 정교구성을 위해 한편으로는 ‘인구의 통치성’으로서의 ‘국가이성’과 ‘자유주의’(‘전후 독일 자유주의’와 ‘미국 신자유주의’)를 분석하고(130-134쪽),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의 통치성’으로서의 ‘사목 권력’과 ‘고백의 형태들’을 분석한다. 우선 푸코는 “개인의 특수성에 따라 자신을 조정하려 하는 통치 형태들”을 검토하고자 하는 맥락에서 ‘사목 권력’을 분석한다. 이후 푸코는 이 사목 권력에 대한 분석에서 “영혼에 대한 기독교적 통치”에 대한 분석으로 이행하는데, 이 후자의 분석에서 푸코는 ‘참회’(exomologèse)라는 첫 번째 고백의 형태와 ‘고백 의무’(exagoreusis)라는 두 번째 고백의 형태를 취급한다. 이 지점에서 푸코는 고대적 형태의 주체성과 기독교적 형태의 주체성을 대조하는데, 이 두 주체성 모두는 주체가 “진실의 담론”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점에서 “진실의 시험”이지만, 기독교적 형태의 경우 두 가지 고백의 형태를 통해 알 수 있는 “‘타자’에 대한 복종”을 통해, 고대적 형태의 경우 (후기에 들어 집요하게 분석되는) “‘자기 자신’의 자유에 대한 복종”을 통해 구성된다는 차이점을 지닌다.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주체성에 대한 대조로 인해 푸코에게서 통치성 개념은 “자기의 차원으로 회귀”하려 하며 이 “자기의 차원으로부터 재정의”되고자 한다. 주체라는 차원은 “주체가 주체 자신으로부터만 취하게 되는 통치성의 형태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개방되는 것”이며, 이러한 차원에 대한 사유 이후 푸코에게서 “자기의 실천은 역사적 경험을 구성하기 위해 권력관계, 그리고 진실의 담론과 결합”된다. 이러한 결합으로 인해 푸코에게서 자기의 실천, 권력관계, 진실의 담론이라는 “환원 불가능한 세 가지 차원”이 확립되고, ‘주체화의 실천’이라는 중기와 후기 사이의 사유의 가교가 확립된다(134-137쪽).

『미셸 푸코』의 3장 ‘주체화의 실천’은 후기 푸코의 사상을 재구성한다. 초기에서 중기로 이어지는 푸코 사상 진화의 이러한 흐름을 고려한다면, 『섹슈얼리티의 역사 2권: 쾌락의 활용』과 『섹슈얼리티의 역사 3권: 자기 배려』로 대표되는 후기 푸코의 최후의 연구들은 “주체의 확정적 제거라는 1960년대의 단호한 선언 이후 그가 다시 구원적 주체로 귀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후기 푸코의 최후의 연구들은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의 결과물이 아니며, 푸코의 작업에 이러한 방향 전환이 필요할 정도로 어떠한 “내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섹슈얼리티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에서부터 출발해 ‘섹슈얼리티의 역사’라는 관점하에 재통합되는 후기 푸코의 모든 연구들은 “갑작스레 주체 개념을 축으로 한 자연적 중력을 발견”한 것이며, 더 나아가 푸코는 “주체”를 자신의 모든 탐구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초기에서 중기까지의 푸코 사유가 명시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그러니까 부정적인 방식으로 주체라는 축을 중심으로 짜여졌다면, 후기에서 드디어 푸코 사유가 명시적으로, 그러니까 실정적인 방식으로 주체 개념이라는 항구적 축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139-140쪽).

후기 푸코의 사유가 취하는 쟁점은 “주체가 진실과 맺는 관계가 주체의 존재 자체와 강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 진실과의 관계에서 주체의 역사적 구성”인데, 이 문제가 초기 푸코에게는 ‘지식’의 차원에서, 중기 푸코에게는 ‘사회적 실천’(즉 권력)의 차원에서, 후기 푸코에게는 ‘섹슈얼리티’(넓게는 자기가 자기와 맺는 욕망의 관계)의 차원에서 사유되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는 문화 내 ‘지식의 영역들’(초기 푸코의 사유 대상), ‘규범성의 유형들’(중기 푸코의 사유 대상), ‘주체성의 형태들’(후기 푸코의 사유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경험’으로 규정하면서 이 경험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사유의 새로운 재중심화 기획을 정교구성한다. 그래서 우리가 초기, 중기, 후기 푸코의 기획 전체를 “진실의 작용(진실 진술), 권력의 작용(법 진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의 작용(주체화) 사이의 역사적 주름으로 사고되는 경험들(광기, 범죄, 섹슈얼리티 등)에 대한 분석”으로 재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후기 푸코는 주체의 경험(특히 섹슈얼리티에 대한 경험)에 관한 일련의 연구에 착수함으로써 초기 입장들을 “체계화하는 수단”을 발견하게 된다. 1960년대의 초기 푸코가 “주체 개념을 비판하고 오직 이 비판에 기반해서 구조주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정립했”을 때, 그의 비판 대상은 바로 “무역사적인 논리적 실체, 통일적 종합의 작동자, 의미 부여, 본래적 경험, 보편적 가치의 초역사적 담지자로서의 주체”였다. 반면 후기 푸코가 소환하는 주체는 “그 존재 방식이 완전히 역사적인(왜냐하면 이는 정확히 주체에 대한 계보학을 형성하는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주체,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부터 결정되는 양태로서 경험의 세 차원 중 하나를 구성하는 것으로 사고되는 주체”이다. 결국 후기 푸코에게서 주체성의 역사적 형태들은 “진실의 작용(‘지식’)과 주어진 정상성의 형태(‘권력’)와 함께 구성”된다. 그러므로 후기 푸코는 이 주체성의 역사적 형태들에 대한 사유를 통해 어떠한 (구성하는) “주체의 철학”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이고 계보학적인 연구에 종결 원리를 부여함으로써 그 연구들을 완성하는 세 번째 차원으로서의 주체화 영역에 대한 개념화”(즉 구성되는 주체 또는 주체화의 철학)를 구성하는 것이다. 중기 푸코의 계보학적 연구에서 주체는 “권력의 테크놀로지의 부산물이자 그와 관계된 것”으로 “평가절하”된다. 즉, 중기 푸코에게서 “규율 메커니즘은 개인에 맞추어 자신을 조정했고, 개인을 그 신체적 행동의 미세한 결 안에 투입했으며, 개인의 신분증명서를 인간과학이라는 형태로 발급했”던 것과 달리, 후기 푸코에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 즉 주체성은 “권력 체계에 대한 가능한 저항의 형태로, 이전의 권력이 패배하는 지점으로 또는 권력이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이행하는 지점으로 간주”된다. 후기 푸코는 이를 통해 “어떻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서의 주체성이 통치성의 작용과 진실의 작용으로 인해 복잡화되는 주체화의 작용을 도입하는지”를 보여주며, 이러한 통치성(또는 권력), 진실, 주체화의 “작용들의 복잡화” 또는 “작용들의 작용” 속에서 주체의 “자유”를 (더 나아가서는 주체의 진실-말하기 즉 파레시아를) 출현시킨다(141-145쪽).

에티엔 발리바르의 탁월한 규정에 따라 ‘구조주의’ 사상의 핵심이 ‘구성하는 주체’를 ‘구성되는 주체’로 전도시키고 이 구성되는 주체를 사유하는 것이며, 이 구조주의에 대한 하나의 정정 운동으로서의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의 핵심이 ‘주체성의 한계들’을 ‘윤리적’ 차원에서 사유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면, 초기 푸코에서 중기 푸코로, 중기 푸코에서 ‘윤리학자’ 후기 푸코로의 이행은 지식, 권력, 주체성을 차례로 사유함으로써, 구성되는 주체와 그 주체성의 한계들을 사유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나아가는 푸코의 ‘(포스트-)구조주의’적 행보로 설명될 수 있다. 푸코의 사상 전체에 대한 그로의 탁월한 재구성은 이 (포스트-)구조주의자 미셸 푸코의 철학적 대상이 일관되게 주체, 주체성, 주체화이며, 단지 초기에는 이 철학적 대상이 구성되는 주체라는 형태하에서 부정적인 방식으로 사유되다가 통치성, 진실, 자유를 탐구하는 중기를 거쳐 결국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로서의 주체성을 강하게 사유하는 후기로 가면서 주체성에 대한 사유 덕분에 섹슈얼리티의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자기라는 형태하에서 긍정적인 방식으로 사유되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일원론적 푸코 해석의 관점에 서야만, 지식, 권력, 주체라는 세 꼭지점으로 구성된 푸코적 삼각형이 ‘자유’와 ‘진실-말하기(파레시아)’ 개념을 주체 개념과 결합함으로써 주체성의 한계에 관한 사유 속에서 권력에 저항하는 윤리적 또는 정치적 주체를 생산한다는 점을, 그러니까 푸코에게서 “우리 자신의 윤리적 변형” 즉 “새로운 주체성의 정치적 발명”(146쪽)이 의미하는 바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미셸 푸코』의 결론에서 언급되는, 푸코에게서 “철학을 한다는 것이 갖는 현대적 임무” 즉 “우리의 삶을 바꾸기”는 이러한 주체, 주체성, 주체화에 대한 사유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철학의 역할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새롭게 다시 발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야기들”, 주체에 관한 서사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점이, 그래서 푸코에게서 철학의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은 정통 철학사가 애지중지하는 “형이상학적 체계”가 아니라 이단적 정치철학이 미래의 주체를 위해 생산하는 “정치적 허구”라는 점이 명료히 이해된다.    


배세진 박사·정치철학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프랑스 파리대학교 ‘사회학 및 정치철학’ 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푸코-마르크스주의와 화폐: 노동-가치, 물신숭배, 권력관계 그리고 주체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비데 등의 현대 프랑스 철학을 사회과학 내 문화연구의 틀에서 연구·번역하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연구』, 루이 알튀세르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검은 소』, 제라르 뒤메닐·에마뉘엘 르노·미카엘 뢰비의 『마르크스주의 100단어』와 『마르크스를 읽자』(공역), 자크 비데의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과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의 『사회학자와 역사학자』(공역)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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