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음 · 취식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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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음 · 취식 전후?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 승인 2022.11.2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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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며칠 전 서울 시내의 한 음식점에 들렀다. 그런데 음식점 유리창에 “취음 · 취식 전후 마스크 착용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글을 굳이 이렇게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취식’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군대에서 주로 쓰는 말이다. ‘취음’은 ‘취식’에 이끌려서 만들어진 말로 보이는데 한국어 사전에는 아직 등재되어 있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주민 게시판에 “쇼핑을 마치시고 세대 복귀 전에 사용하셨던 쇼핑 카트를 ㅇㅇㅇ(쇼핑 시설) 쪽으로 이동 조치 부탁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여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세대 복귀’니 ‘이동 조치’니 하는 말이 아파트 주민 게시판에 붙어 있다니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이처럼 민간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안내문이나 표지판 등에 군부대에서나 들을 법한 용어들이 쓰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작 일선 군부대에서는 어려운 용어들을 쉬운 말로 바꾸어 쓰려는 노력을 적어도 10년 전부터 꾸준히 해 왔는데 군에서 민간으로 유입된 용어들은 이처럼 사회 곳곳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평상시에는 잘 쓰지 않을 법한 군사 용어들이 유독 안내문이나 통지문 같은 데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성인기 이후에 글쓰기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병역 의무를 완전히 면제받지 않은 한국인 남성들은 기간이나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 어떠한 식으로든 군사훈련을 받게 된다. 그런데 성인기 초기에 해당하는 이때 군부대에서 수많은 문서들과 구두 지시들을 접하다 보면 군대식 표현 방식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온 뒤로도 글쓰기를 할 일이 있을 때 위 사진 속 문구처럼 군대에서 쓰던 용어와 표현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기가 쉽다. 물론 한국에서 병역 의무는 남성들만 지고 있지만 이 사회는 아직도 남성 위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공무원들이 작성하는 공문서들에도 군필 남성들의 영향으로 군사 용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보니 여성들도 군사 용어에 생각보다 많이 노출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물론 군사 용어를 순화하는 것이겠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학교를 졸업한 성인들이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군부대나 공공 영역 안에서만 말 다듬기를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시민 교육, 사회 교육 차원에서 ‘쉽고 명료한 글쓰기,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바꾸어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하기’ 같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

물론 생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서 글쓰기 공부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글쓰기와 관련된 것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하고 지역 사회 곳곳에서 글쓰기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공간을 늘려 나간다면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국 곳곳의 공공 도서관이나 문화시설 등에서 지금도 이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더 늘릴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혹시 대학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모두가 대학의 위기를 고민하고 있는 이때, 대학이 학생들은 물론 시민 사회 전반의 글쓰기 교육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대학도 살고 시민 사회도 함께 사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대학 차원에서 이와 관련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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