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목과 증오, 그리고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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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목과 증오, 그리고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생명력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2.11.21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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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사진=쇼노트 제공

“아니타는 제트파의 아지트와 같은 닥 아저씨의 가게로 간다. 마리아의 은밀한 부탁 때문이다. 살인으로 치달은 제트파와 샤크파의 패싸움 진상을 조사하는 슈랭크 경관의 눈을 피해, 마리아는 아니타에게 마치 암호처럼 토니를 향한 메시지를 전한다. 닥 아저씨의 가게로 갈 테니 기다리라고. 마리아를 이해하고 있는 아니타는 제트파의 소굴로 들어간다. 하지만 리더 리프를 잃은 제트파는 아니타의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더러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니타가 애인 베르나르도를 잃고 그를 죽인 토니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가게로 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아니타를 성적으로 희롱하고 망가트린다. 제트파의 집단적인 폭력을 경험한 아니타는 마리아의 부탁을 들어주고 토니를 도우려했던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처절하게 깨닫고, 분노한 치노가 마리아를 죽였다고 ‘거짓으로’ 외친다.” 

2막 후반부의 이 장면은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초연 1957년, 브로드웨이 윈터가든)의 핵심을 품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원작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당시 베로나에 퍼졌던 전염병으로 인해, 로렌스 수사의 편지가 만투아에 추방된 로미오에게 전달되지 못했던 원작의 장면에 대응된다. 원작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을 ‘불가항력적 상황’이 직접 견인한 것으로 처리했다면, 뮤지컬은 ‘아니타의 변심’으로 각색한 것이다. 

원작에서 전염병은 은유가 아니라 당대 현실을 환기하던 것이었다. 황수경의 논문 「전염의 시대: 『로미오와 줄리엣』에 내재하는 전염병 문화」(『Shakespeare Review』 57.1, 2021)에 의하면, 작품 창작의 추정년도인 1595년경에는 1593년 런던 인구의 12%를 죽인 림프절 페스트(Bubonic Plague)의 영향력이 여전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도 전염병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통해 원수 가문 사이의 화해를 이끌어내고 싶었던 로렌스 수사는, 줄리엣의 가사 상태를 이용하여 두 사람의 비밀 합일을 계획하는 편지를 존 수사에게 맡긴다. 그러나 존 수사는 감염에 대한 의심으로 격리 조치되어, 결국 로미오는 줄리엣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몬테규 집안 하인의 전언을 먼저 듣고 줄리엣의 옆에서 자살한다. 두 가문 사이의 증오에 전염병이라는 당시 상황을 더해 비극의 개연성을 높인 것이다.

 

사진=쇼노트 제공

뮤지컬은 전염병 대신 1950년대 미국의 상황을 넣어 현실을 환기한다. 제트파와 샤크파로 대표되는 이민자 집단 간의 충돌, 용광로(melting-pot) 정책 안에 놓인 이민자들의 정체성 문제, 그리고 바닥에서 끓고 있는 세대와 젠더 문제를 다룬다. 닥 아저씨 가게로 가기 위해 아니타는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마치 줄타기 하듯 움직여야 했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미국에 이민 온 푸에르토리코인, 샤크파 여성이기 때문이다. 아니타는 그동안 애인 베르나르도에게 제트파의 무지에 가까운 폭력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았다. 그보다 진짜 미국인이 되고 싶었던 마리아의 친구 아니타에게는, 리프와 베르나르도에 이어 토니가 죽을 수도 있는 ‘지금’이 중요했으며 그 죽음이 마리아에게 미칠 비극이 더 무서웠다. 그러나 제트파에게 아니타의 행동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전혀 갖지 않았다. ‘증오’는 모든 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기준이었다. 따라서 아니타의 변심은 사실 ‘각성’에 가까운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진정성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그저 무지한 폭력배일 뿐이며, 자신-여성의 몸에 육박해 들어오는 폭력적인 남성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이제 아니타에게는 친구도, 미국인-되기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마지막 거짓말은 현실에 가득찬 증오에 눈을 뜬 ‘남미 이민자 여성’이 외치는 목소리로 번역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제트파는 거들먹거리며 마치 원래부터 미국인이었던 행세를 하지만 이들은 샤크파보다 조금 먼저 이민 온 하얀색 피부의 사람들이다. 폴란드, 이탈리아,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된 제트파 집단은 여전히 블루 칼라로 사는 부모를 둔 미국계 2세들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이 된 그들이, 본질적으로 샤크파와 다를 것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이주 시기’만 있을 뿐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이렇게 미국의 이민자 문제를 섬세하게 다룬다. 뒷골목 이민자 집단 안에서 인종과 계층 문제로 분파가 갈리고, 미국 시민권 여부로 이권이 쏠리는 현실을 포착한다. 당시 창작진(대본 아서 로렌츠, 작곡 레너드 번스타인, 연출/안무 제롬 로빈스, 작사 스티븐 손드하임)들은 원작이 갖고 있는 ‘불가해한 운명’의 요소들을 덜어내는 것을 각색의 포인트로 삼았다. ‘원작에서 보이는 가문 간의 근거 없는 충돌, 설득력 없는 반전, 전달되지 않는 메시지, 간단한 오해들, 마법의 약’ 등을 제거하여 리얼리티를 높이려 했다. 아니타의 각성은 이 모든 것을 응축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22년의 한국 뮤지컬 신(scene)에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연출 김동연, 음악감독 김문정, 제작 쇼노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2. 11. 17~2023. 2. 26)는 이런 애초의 의도가 모던하거나 충격적으로 읽히지 않는 올드 ‘클래식’으로 수용되고 있다. 그동안 뮤지컬은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며 진화해왔으며, 특히 한국 뮤지컬 관객들은 많은 학습을 통해 독특한 취향을 개발해왔다. 인물의 ‘밀도 높은’ 서사(혹은 관객 스스로 밀도를 높일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는 서사)와 대극장 무대를 꽉 채우는 드라마틱한 고음으로 끝나는 넘버는 핵심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공고하고 엄격한) 이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공연처럼 보인다. (토니 박강현, 마리아 이지수, 아니타 김소향, 리프 정택운, 베르나르도 김찬호로 관극했다.) 가령, 마리아 밖에 모르는 토니는 일직선으로만 달리는 ‘납작한’ 인물로 보이며 게다가 너무 부유하게 생겨 뉴욕 뒷골목 깡패 집단을 만든 10대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다. 오빠 베르나르도를 죽인 토니를 그렇게 빨리 용서하고 바로 하룻밤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제트파들은 어떤가. 그들은 고민 없이 상황에 쉽게 휩쓸리고 어찌할 바 모르는 대책 없는 아이들로 그려진다. 리더 리프가 죽은 후 그들은 애도 대신 자기들끼리 모여 크럽키 경관을 비웃는 일종의 놀이를 즐긴다. 아니타 역시 베르나르도의 죽음보다 토니와 마리아의 결합에 더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쇼노트 제공

그러나 주요 인물 서사의 빈약함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모든 것은 아니다. 여전히 쇼튠이 강세였던 1957년의 브로드웨이에서 12음렬 기법과 모티브적 통합 구조를 사용한 번스타인의 음악은, 음악과 드라마를 모티프 단위로 묶어 앞으로 나올 드라마를 예고하거나 암시함으로써 뮤지컬 문법을 확장시켰다. 또한 제롬 로빈스의 안무는 드라마를 보완하거나 장식하는 차원을 넘어 ‘드라마 그 자체’를 재현함으로써 아그네스 드 밀 이후 ‘뮤지컬 안무가’의 역사를  새로 쓰는 차원으로 나아갔다. 2022년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갖는 최대 미덕은 공연의 정통성(authenticity)을 밀고 나갔다는 점에 있다. 무엇보다, 안무와 음악의 예술적 수위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달성하려는 프로덕션 전체의 노력이 감지된다. 깔끔하게 조련된 앙상블의 군무와 토니와 마리아의 희망을 담는 발레 장면의 판타지에서는 정통성에 대한 뚝심마저 엿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2막의 시작을 여는 마리아의 ‘I feel pretty’를 ‘나는 예뻐’로 불렀던 오래된 번역을 삭제하고, 토니와의 사랑에 들떠 ‘좋은 기분, 즐거운 기분’을 느끼는 마리아로 변모시킨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또한 무대/영상/소품을 디렉팅한 오필영, 조명디자인 이우형의 조합은 공연의 예술적 수위를 한층 끌어올리는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토니는 죽기 직전 마리아에게 ‘니가 올 것을 끝까지 믿었어야 했다’고 웅얼거린다. 그는 이 웅얼거림 안에서 비로소 성장한다. 그의 성장은 너무 늦게 찾아왔으나, 홀로 남은 마리아를 변모시킬 것이다. 마리아는 토니의 죽음을 통해 아니타처럼 증오를 배운다. 그렇다면 이제 마리아는 복수심에 가득한 전사로 살아가게 될까? 아니면 반목과 증오를 종식시키기 위해 평화주의자가 될 것인가? 머리에 숄을 두르고 천천히 걸어가는 마리아의 뒷모습을 쓸쓸하게 비추는 공연의 마지막은, 세상에 반목과 증오가 존재하는 이상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언제나 현재형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마리아는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이민자-여성으로 거듭나야 할 때를 마주하고 있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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