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조선 문단의 문학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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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조선 문단의 문학 비평사
  •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22.11.20 17:3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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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비평의 변증법: 김환태·김동석·김기림의 문학비평』 (김욱동 지음, 이숲, 332쪽, 2022.11)

 

이 책을 쓰는 동안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날개를 편다”는 경구 한 마디가 나의 뇌리를 맴돌았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법철학의 원리』 서문에 남긴 이 말은 뒷날 카를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판하며 다시 한 번 이 문장을 언급하면서 서양 철학사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경구는 지금도 여전히 뭇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건만 그 의미는 수수께끼처럼 아리송하여 좀처럼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미네르바는 로마신화에서 지혜의 여신이고, 야행성 조류인 부엉이는 미네르바의 상징으로 세상을 살피고 신의 말을 세상에 전하는 전령이다. 하루해가 저물고 황혼이 찾아와 온 세상이 어두워져서야 비로소 지혜의 새가 날개를 펴고 활동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철학이든 사회 문제이든 모든 현상은 그것이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그 실체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는 문학 비평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 쏟아져 나온 비평도 백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모습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더구나 20세기 전반기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식민지 시대에 활약한 비평가들로 볼 수 있고, 황혼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당시 비평가들은 시인들이나 소설가들과 비교하여 비록 수에는 미치지 못했어도 그들 못지않게 크게 활약하였다. 창작가들과는 달리 주로 논리와 지성에 의존하는 비평가들이 당시 이룩한 업적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실제로 한국문학의 배가 험난한 식민지 시대의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데는 비평가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조선인 문학 비평가는 줄잡아 50여 명에 이른다. 가나다 순서로 말하자면 “강경애(姜敬愛)에서 홍효민(洪曉民)까지”라고 말할 수 있다. 같은 기간에 활약한 시인이 130여 명이고 소설가가 100여 명인 것과 비교하면 평론가의 수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이 무렵에는 오늘날과는 달라서 문인들은 어느 한 문학 장르의 집에 안주하기보다는 여러 장르의 집을 자유롭게 오가며 동거하였다. 말하자면 당시 문필 활동은 오늘날처럼 분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겸업의 형태로 폭넓게 이루어졌던 셈이다. 

그렇다면 50여 명에 이르는 문학 비평가 중에서 이 무렵 가장 눈에 띄게 활약한 사람은 누구일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식민지 조선 문단에서 비평을 독립된 문학 장르로 굳건한 발판에 올려놓은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이 물음에 답하는 사람의 문학관과 세계관에 따라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답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비평가 중에는 영문학을 비롯한 외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유난히 눈에 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도쿄 소재 대학에서 외국문학을 전공하던 유학생이 조직한 ‘외국문학연구회’에서 활약한 회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밖에도 많은 외국문학을 전공하던 젊은 학생들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비평 담론에 참여하였다. 가령 김기림(金起林), 김환태(金煥泰), 김동석(金東錫), 최재서(崔載瑞), 김기진(金基鎭), 이양하(李敭河), 정인섭(鄭寅燮), 김문집(金文輯), 이원조(李源朝), 권환(權煥), 백철(白鐵), 임학수(林學洙) 등 열 손가락이 모자라 모두 헤아리지 못할 정도다. 외국문학을 전공하다 보니 아무래도 시나 소설 같은 창작 쪽보다는 좀 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비평 쪽에서 활약한 사람들이 많았다. 

김환태, 김동석, 김기림이 모두 관심을 둔 영국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전집' 초판본 (1623)

이렇게 많은 비평가 중에서도 나는 이 책에서 김환태, 김동석, 김기림 세 사람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 사람은 서로 닮은 데가 적지 않다. 가령 그들은 일제강점기 고급 관료를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제국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김동석은 경성(京城)제국대학, 김환태는 규슈(九州)제국대학, 그리고 김기림은 도호쿠(東北)제국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또한 그들은 여러 분야 중에서도 유독 영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였다. 그런가 하면 영문학을 전공하는 목적이 영문학 연구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조선문학의 토양을 좀 더 비옥하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도 세 사람은 서로 비슷하다.

이렇게 내가 유독 세 비평가에 주목한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첫째, 많은 비평가를 단행본 한 권에 다룬다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물론 그들을 모두 다룰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자칫 수박겉핥기 식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무척 크다. 둘째, 위에 언급한 비평가 중에서 정인섭과 이양하와 최재서는 별도의 단행본에서 이미 다루었고, 나머지 비평가들은 다른 기회에 다룰 예정이다. 셋째, 김환태, 김동석, 김기림은 마치 이등변삼각형의 세 모서리와 같아서 저마다 독특한 비평관을 견지한다. 이등변삼각형의 한쪽 밑변 모서리에는 김환태의 심미주의 비평이 굳게 자리 잡고 있고, 다른 쪽 밑변 모서리에는 김동석의 사회주의 비평이 자리 잡고 있다. 삼각형의 꼭짓점에는 딱 부러지게 심미주의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사회주의라고도 할 수 없는 김기림의 비평이 버티고 서 있다. 20세기 전반기 문학 비평은 이렇게 김환태와 김동석의 두 축으로 이루어졌고, 두 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한 것이 바로 김기림이었다. 1930~1940년대에 활약한 이 세 비평가는 말하자면 한국 문학 비평을 화려하게 장식한 삼총사였다.

그러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이 시를 짓고 정순철(鄭淳哲)이 곡을 붙인 「형제별」이라는 동요가 새삼 떠오른다. “날 저무는 하늘에 / 별이 삼형제 / 반짝반짝 정답게 / 지내이더니 / 웬일인지 별 하나 / 보이지 않고 / 남은 별이 둘이서 / 눈물 흘리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가는 것처럼 암울한 시대에 어린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던져주던 이 동요처럼 세 별 중 하나인 김환태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김동석은 한국전쟁 전에 월북하고 김기림은 전쟁 중에 납북되어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에 비평의 하늘에서 반짝이던 세 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형제별’처럼 그렇게 ‘정답게’ 지내지는 않았다. 본디 ‘비평가’라는 말 자체가 남의 허물이나 결점을 들추어내거나 잘잘못을 판단하는 ‘심판자’라는 말에 뿌리를 둔다. 특히 김환태의 비평관과 김동석의 비평관 사이에는 좀처럼 넘기 어려운 높은 벽이 가로 놓여 있었다. 이 두 비평가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던 김기림 비평의 천칭은 어떤 때는 김환태 쪽으로, 또 어떤 때는 김동석 쪽으로 기울었다. 테제가 안티테제에 의하여 갈등과 모순이 극복되면서 역사가 진보하듯이 문학 비평도 궁극적으로는 정반합의 모순과 대립을 통하여 발전해 나가게 마련이다. 이 책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점은 문학 비평이 건강한 논쟁과 토론의 힘으로 한 단계씩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코로나19의 창궐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전보다 훨씬 멀어졌지만 개인 차원에서 보면 자신을 돌아보며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순기능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책에서 다루는 세 비평가 모두 공교롭게도 19세기 영국 비평가 매슈 아널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널드의 주장대로 문학이 ‘삶의 비평’이라면 코로나 시대에 문학은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또한 사회적 거리는 나에게 그동안 다른 일에 치여 차일피일 미처 손을 대지 못하던 연구를 완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 책도 그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 인문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환경문학, 번역학, 수사학, 문학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해 온 인문학자다. 주요 저서로는 《이양하: 그의 삶과 문학》(2022), 《환경인문학과 인류의 미래》(2021),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2020), 《외국문학연구회와〈해외문학〉》(2020), 《아메리카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2020), 《눈솔 정인섭 평전》(2020), 《하퍼 리의 삶과 문학》(2020),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들》(2020)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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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일 2022-11-24 10:34:2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기회 되는 대로 책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현일 2022-11-24 10:32:34
소파(小派) 방정환(方定煥)의 '파'는 물 갈래 파 '派'가 아니라 물결 파 '波'로 써야 합니다. 큰글씨로 입력하는 기능이 없어서 잘 안보이실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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