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기반 융합연구 사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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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기반 융합연구 사례 보고
  • 정우진 경희대·동양철학
  • 승인 2022.11.2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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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융합연구와 교육

학문은 유의미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종종 너무 크고 넓은 혹은 몹시 미미한 주제를 고찰하므로 현실과 무관해 보일지라도, 학문은 언제나 유의미성을 추구해 왔다. 학문적 유의미성은 현재적이거나 미래적인 문제해결을 통해 구현된다. 공학적 해결뿐 아니라 즐거움과 감동의 선사, 새로운 발견 등도 문제해결에 해당된다. 이러한 문제는 여러 영역에 걸쳐 있으므로, 융합연구는 유의미한 학문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분과학과 융합연구는 모순적이다. 분과학은 주제와 학문방법론을 달리하는 영역들로 구성된 현재의 학문제도·문화를 일컫는 말인데, 융합연구는 그런 특성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양자를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분과학의 경계가 좀 더 느슨해져야 하고, 학자들의 이동이 보다 자유로워져야 한다. 

융합연구와 협동과정이 제안되었지만, 진정으로 질적 결합을 이룬 경우는 많지 않은 듯하다. 학자 자신이 융합연구자와 교육자가 되는 것이 실질적 대안이다. 이것은 개별 단위의 시도이므로 당연히 질적 결합이 존재하고 미래의 융합연구자를 양성할 수 있으므로 궁극적 해결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존적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융합연구자는 어느 분과학에도 전문화되지 않았다고 평가받음으로써, 대학에서 직업을 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고, 그가 의도하는 강의는 기존의 교과과정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개설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관심주제의 연구를 위해 기꺼이 타 영역으로 들어가는 연구자들과 융합교육을 시도하는 교육자들이 있어왔다. 동양철학자로서 나도 스스로 융합연구자와 교육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부끄럽고 일천하지만 내 경험을 모범이 아닌 사례로 융합연구와 그에 기반한 융합교육의 길을 모색하는 분들, 특히 철학에 기반한 융합연구와 교육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다. 
 
철학기반 융합연구는 크게 세 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철학이 융합연구에 적합하다고 할 때 상기되는 것인데, 특정 학문의 기본 가정과 핵심개념에 관한 메타연구가 그것이다. 다양한 학문은 모두 특정한 기초개념과 그런 기초개념을 뒷받침하는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의학의 질병개념은 물리주의에 토대하고 있다. 질병개념의 한계를 그런 질병개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세계관의 층위에서 고찰하는 것이 의철학이라는 융합학문의 주요한 연구방법이자 주제다. 이런 유형의 융합연구는 크게 세 단계로 이뤄진다. 첫 단계에서는 문제를 탐색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해당 문제의 토대를 이루는 기초개념과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기초개념과 세계관의 한계에서 문제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기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형이상학에 기반한 모델을 제안한다. 

두 번째의 철학기반 융합연구 유형은 인접분야의 논의와 경험지식의 기반 위에서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에 대한 개선된 해석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융합연구는 철학의 세부 분야에서 주제를 발굴하고 관련된 이론과 경험지식을 타 영역에서 탐색한 후, 새로운 철학적 해석을 제안하는 과정을 따른다. 끝으로 다양한 분과학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를 고찰하는 유형이 있다. 생명윤리라고 불리는 연구프로그램이 이런 예에 속한다. 생명윤리 등의 응용윤리는 이미 하나의 독자적 학문단위로 정립되어 있으므로 이곳에서 부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사례 보고: 정신질환에 관한 철학적 고찰

첫 번째 유형의 철학기반융합연구는 문제탐색에서 시작한다. 현재의 사회적 갈등을 단서로 삼을 수도 있지만, 인류의 지성사에서 찾아낼 수도 있다. 정신질환이 질환인가라는 질문은 오래된 그리고 논쟁적인 질문이다. 60년대 초에 사즈(Thomas Szasz), 푸코(Michel Foucault), 그리고 랭(Ronald Laing) 등은 정신질환의 ‘질환’에 관해 이의를 제기했고, 67년 쿠퍼(David Cooper)는 이들을 반정신의학자로 범주화했다. 이들의 문제를 연구주제로 삼았다면 다음에 할 일은 정신질환이 질환임을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토대를 탐색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질병개념은 시대마다 그리고 문화권마다 달랐다. 빈번한 변동은 없었으나 큰 변화가 있었다. 근현대 의학과 동서양의학은 각기 다른 질병개념에 토대하고 있다. 각기 상이한 형이상학에 토대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물리주의에 토대한 구조 혹은 기능이상을 질병개념으로 수용한 현대의학이 성립했다. 그리고 정신의학자들은 정신적 고통도 이러한 질병개념 안에 포함시켰다. 이들이 취하고 있는 정신질환에 대한 물리주의적 접근에 한계가 있음을 보이고, 뇌질병설의 주요한 논거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행함으로써 두 번째 단계가 완성된다. 끝으로 정신질환의 새로운 모델을 제안한다. 융합교육은 미래의 융합연구자를 육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한 연구결과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연구과정이 전달되어야 한다. 나는 이번 학기에 위와 같은 절차를 따르는 정신질환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연구 중에 발생하는 어려움을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례 보고: 장자의 마음에 관한 연구

장자의 마음에 관한 연구는 특정 철학분과의 세부 주제를 다른 영역의 논의에 의거해서 고찰하는 두 번째 유형의 철학기반 융합연구에 해당한다. 이 연구에는 망아(忘我)의 상태에도 합리성이 있는가와 그때의 자아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쟁점이 포함되어 있다. 장자철학은 현자 혹은 성인의 마음에 관한 이론과 실행의 체계라는 점에서 ‘마음의 철학’ 그리고 ‘인지과학’과의 융합연구가 가능하다. 

장자는 성인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장인의 기술수행을 예거했는데, 2005~2007년 드뤼푸스(Hubert Dreyfus)와 맥도웰(John Macdowell)은 전문가의 기술수행을 포함하는 일상적 행위에 합리성이 수반되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다퉜다. 드뤼푸스는 전문가의 기술수행에는 합리성이 없다고 보았지만, 맥도웰은 실천적 합리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경과학적 증거에 따르면 걷기 등의 일상적 행위와는 달리 전문가의 기술수행에는 높은 수준의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전전두엽피질 부위가 활성화된다. 요컨대 장인의 기술수행은 비언어적이고 비표상적이며 상황의존적인 체화된 대응(embodied coping)의 특성 외에도 고도의 의식적 집중과 합리성이 수반된다고 할 수 있다. 

장자는 망아의 체험을 ‘내가 나를 잃었다.’고 함으로써 성인의 자아가 복수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줬다. 잃어버린 자아는 계획하고, 기억을 회상하는 고차적 마음임이 비교적 분명한데, 장인이 기술수행에 몰입한 상태에서도 남아있는 자아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했다. 근래에 스트로손(Galen Strawson)의 minimal self 개념이 고차적 인지를 행하는 자아를 해소한 상태에서 남는 자아라는 해석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다마지오(Antonio Damasio)가 제안한 proto self 개념이 보다 적절한 개념으로 보인다. 이번 학기에 나는 마음의 철학과 인지과학의 연구성과를 차용해서 장자의 마음을 고찰하는 과정을 담은 강의를 진행 중이다.   


나가며

결국 마음이 문제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비록 소수일지라도 학문을 목적이 아닌 진리탐구의 수단으로 여기는 융합연구에 적절한 성향을 지닌 학자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융합연구를 통해 더 많은 연구성과를 내고, 자신의 연구과정을 교육에 반영함으로써 한국의 학문문화를 바꿀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동안 융합연구에 관한 논의를 적지 않게 접해왔으나, 융합연구의 실제 사례를 들어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부족한 대로 나의 연구와 강의를 사례로 제안한다.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나’를 남발한 느낌이다. 이해를 구한다. 


정우진 경희대·동양철학

고려대학교 철학과와 한국학대학원에서 공부했고, 경희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사천대학교와 대만 대중과기대에서 방문학자로 도교를 연구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철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한의철학, 도가도교 및 동양과학 분야를 연구해 왔으며, 주요 저·역서로 『몸의 연대기: 동아시아 몸의 역사와 철학』, 『양생』, 『몸의 신전: 황정경 역주』, 『감응의 철학』, 『몸의 노래(공역)』, 『노자상이주역주』, 『한의학의 봄』 등이 있다. 현재는 도가·도교와 불교의 수행철학적 성취 그리고 정신의학과 인지과학의 과학적 성과에 토대해서 마음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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